정영자 #소설 아닌 #소설쓰기

2024. 12. 23. 16:583대 농부가족의 일상들/1대 장명숙,신순규

#소설아닌 #소설쓰기
제 31탄

#나무에서 #떨어져 #머리가 #깨어지다

군위댁은 큰 딸을  도시로 시집을 보내고 텅 빈 자리를 메꾸느라 애를 쓴다.
둘째딸 숙이는  군위댁을 도와 살림을 도와 주지는 않았다. 성깔도 있었지만
그녀는 엄연한 직업인이었다.그때 한창 유행하던 홀치기라는 것이 있었다. 일본의 기모노 원단에 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패턴에 따라 홀치기기계에 비단원단을  묶어 나가는 것이다.
바닥엔 직사각형 나무 판에다  한쪽에 사람의 앉은키만큼 올리고 그 위에 사선으로 길고 가느다란 쇠막대기를 고정 시킨다
그 맨 아래에는 구멍이 나 있어서 송진으로 바늘을 넣어 메운 틀이다.
실꾸리에 실을 감아  달그락 달그락 묶어 나가는게 숙이의 직업인 셈이다. 그 고을에서 맨 먼저  이걸 배웠기 때문에 홀치기 강사 겸 그 사업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녀는 그 일로 돈도 벌고 재미도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매일 앉아서 하는 일이라 어깨가 약간 구부러져 있었다. 이 동네 저동네 다니면서 가르치고 나서 시간 나는대로 일을 했으니 참 고달픈 일이었다 .이걸로 시골 여인들이 밤에는 잠을 줄이고 돈을 벌고 있을 때였다.
홀치기기계를 닮은 등잔대 위에 호롱불을 왼쪽에 두고, 홀치기기계는 오른쪽에 두고 한코 한코를 묶어 나갔다.
금성 라디오가 제일 먼저 양반선비네 집에 들어 왔을때 온동네 사람들이 신문명을 맞이했다.저 작은 통 속에서 사람들이 들어가서 말을 한다고 느꼈다.  직사각형에 손잡이가 달려 있고 채널고정하는 버튼과 소리를 조절하는 버튼 두개가 있었다.
  숙이는 종일 이 라디오를 켜 놓고 홀치기를 했다.주로 노래가 나오는 곳을 돌려가며 들었다.
하도 자주 채널 버튼을 돌려 고장 나기가 일쑤였다
양반선비는 노동은 안 했지만 라디오버튼이 고장이 나면 작은 뻰지로 잘 조여 주어 다시 사용하게 해 주었다.
흘러 나오는 노래는 주로 토르트였다.
"너무나도 그 님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뉘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으으음 때는 늦으리.~~"
문주란의 허스키한 노래가  흘러 나오다가
한맺힌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 흘러 나왔다.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고"
많이 듣고 많이 부르다보니 노래실력이 늘어  선비양반  몰래 노래자랑대회도 나갔다.
외출허락은 홀치기한  물건을 갖다 주고 다시 일할것을 갖고 오는 걸로 했다.
선풍기도 없던 시절이라 더운 여름날에도 홀치기는 계속 해야만 했다.기한이 있어 언제까지 완료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일본사람 옷 즉 기모노에 문양을 넣는 일이 홀치기였다.실로 묶은채로 염색을 하면 예쁜 문양이 나오는 것이다
양반선비네 집에는 감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감나무는 그늘도 좋았지만 감꽃이 피는 계절이면 지푸라기를 다듬어서 감꽃을 꿰어 목에 걸고 다니면서 한개씩 빼 먹기도 하였다.
좀 더 자라면 풋감이 스스로 숫자를 조절하면서 빠진다 .이걸 먼저 주우려고 군위댁 아이들과 의성댁 아이들의 눈치작전이 시작 된다.
"맨 먼저 일어난 새가 먹이를 많이 먹는다" 고 했던가?
사라는 엄니에게  일찍 깨워 달라 부탁을 해서 새벽에 박바가지를 들고 감나무 아래로 갔다.
유감스럽게도 감나무는 작은댁이자 서당인 마당에 있고 작은 개울을 건너가야 하니 무섭기도 했다.
항아리에 따뜻한 물을 붓고 위에는 풀로  입구를 막는다. 아랫목에 이불을 덮고 며칠 두면 감이 삭는 냄새가 난다. 이것을 군위댁은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감나무에 둘째딸 숙이는 홀치기기계를 들고 올라가 지게 모양을 한 가지에 걸쳐 놓고 홀치기작업을 하기도 했다.
물론 금성라디오도 나무에 매달고 말이다. 아슬 아슬한 풍경이었지만 군위댁의 만류는 듣지 않았다.양반선비가 돌아오는 시간이면 스스로 알아서 내려 오곤 했다.

원숭이도 나무에 떨어진다고 했던가?
날다람쥐라고 불리던 둘째딸 숙이는 감나무에 오르다가 떨어져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피는 낭자하게 흙위에 뿌려지고 일곱바늘을 꿰매는 참사가 일어났다.

#소설아닌 #소설 쓰기
제30탄

#빠알간 #초미니원피스를 #입고

양반선비는  나이에 비해 엄청 큰 어른같아 보였다.
훈장님이라 그렇기도 하거니와 집에서 갖는 그 어마무시한 권력은 마치 제왕과도 같았다.
특히 딸에게는 무서운 호랑이와 비슷하였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처지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입만 열면 삼종지도를 말했다.어려서는 부모에게,
결혼해선 남편에게,나이가 들어서는 아들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라 가르쳤다.
여자는 아무런 권위도 가치도 없었다.
군위댁이 사는 걸 보며 늘 생각했다.
그녀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죽어 살았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군위댁같은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처첩을 거느린 선비와 열명의 아이들과 살아간다는 것은 나날이 전쟁과도 같았다.
학교도 졸업을 했고 집에 있어 보았자 군위댁 엄마를 따라 다니며 농사일을 거드는 것이 전부였다.
겨울에는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다.
서당학동들이 거친 나무는 해서 주었지만 불살개용 소나무 갈비나 죽은 나무 등걸 같은 건 없었다.
손과 발만 커다란 군위댁은 뒷동산에 올라 가 갈쿠리로 갈비를 긁어 모았다.
소나무 베어낸 썩은 뿌리도 캐어 모았다.
맨 아래에 끈을 세개를 넣고 또 다른 방향으로 끈을 한개를 펼쳐 놓고  소나무갈비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썩은 나무뿌리도 박아 넣었다
어느 정도 양이 되면 묶어서 머리에 이고 집으로 왔다.
어느 날은 양이 많아서 머리에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지혜로운 군위댁은 홍수가 나서 움푹 패인 곳까지 굴려서 그 아래에 가서 나뭇짐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기도 했다.
사라는 군위댁과 함께 썩은 나무도 모으고 소나무갈비도 모았다. 그리곤 엄니인 군위댁
머리위에 나뭇짐을 올리는데 조력하고 나서  아주 작은 나뭇짐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왔다
몸과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찔리고 손은 거칠어졌다.
그 소나무갈비는 아궁이 속에서
타닥타닥 타 들어가 거칠고 굵은 나무에 잽싸게 달려들어 불심을 키웠다.

  군위댁 둘째 숙이는 어릴때부터 유별 난 아이였다
그 무서운 선비양반의 눈을 피해  아랫동네에서 열린 가설 극장이며, 방송국 노래자랑을 다녔다.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처음 입고 한국에 나타났을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두눈을 뜨고 차마볼 수가 없다고 눈쌀을 찌푸리던 때였다.
이웃집 아저씨가 동생이 서울에 살아서 서울을 갔는데
마침 경부선 고속도로가 개통이 되어 이것을 타고 서울을 갔다 와서 서울 다녀온 소식이 온 동네에 퍼졌다.
그는 양반선비의 문하생이었다.
"선생님. 지가요 서울 동생 보러 다녀 왔는데요
세상에 그리 빠른 버스는 첨 타 봤심더. 팽팽 날라다는게 아마 비행기타는게 그런게 아닌가 몰라요
중간에 서는게 없고 어찌 빨리 달리는지 눈이 휘둥그래지대요.
그리고. 서울에 갔는데 기집아들이 팬티처럼 짧은 치마를 입은게 아실아실하디요.세상이 말세가 될라나 보네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비양반 왈 "말세로다 말세로다.어디 여자가 빨가벗고 길거리를 다닌다 말이고 "
그가 늘 주장하던 동방예의지국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양반선비가 아무리 삼종지도로 여자들을 묶어 두려 했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바람은 깊은 산골 양반선비네도 비켜가지는 못했다.
집을 나갈때는 긴 평상복을 입고 나가 아주 먼곳 즉 선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숙이는 빨간 미니 원피스를 갈아 입고, 머리는 사자머리 파마를 하고 방송국 노래자랑을 몰래 다녀 왔다.
입선은 비록 못했지만 가수를 향한 꿈은 펼쳐 보았으니 대단한 일이었다.
미니원피스는 그가 졸업 후 시골에서 홀치기라는 일을 해서 사비가 축적된 결과였다.
역시 돈이 있어야 유행하는 옷도 맞추어 입는 것이니까...

제 29탄
군위댁은 양반 선비와의 사이에 7남매를 두었다
맨 처음 낳은 딸은 태어나서 홍역으로 보내고 가슴에 묻었지만 그 다음 부터는 아이들을 잘 길러 냈다
첩실인 의성댁이 오고 나서도 딸 하나에 아들 둘을 더 낳아 길렀다.
그러고 보면 양반 선비는 두 여인을 사이에 두고
고루 고루 씨앗을 뿌린 것이다.
한남자와 두여인의 동거는 묘하게도 함께 꾸려지고 있었다.
3년 터울로 7남매를 두었으니 군위댁의 한생은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시부모와 남편을 모시는 삶이 일생이 되었다.
첫째 딸 영이는 양반선비의 마당에서 나름 성대하게 혼례식이 치루어졌다.
다리가 높은 혼례상의 양옆에 대나무를 커다란 병에 꽂아 두고 청홍색 실로 장식을 하였다.
그리고 신랑측이 가져온 기러기(나무로 만들어 색을 입힌)와 신부측이 장만한 수탁과 암탉이 공단보에 싸여 상위에 오른다
그 곁에 술잔도 준비되어 신랑신부가 서로 잔을 주고 받는 의례에 쓰였다.
암탁과 수탁은 다리가 꽁꽁 묶인채 영문도 모르고 산채로 상차림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날따라 수탉의 벼슬은 붉었고 ,암탉은 윤기나는 깃털을 보여 주었다.
신랑은 사모관대로 '신부는 궁중의 왕비 모습에 족두리를 하고 나와 서로 절을 하는 전통혼례를 치루었다.
첫째딸 영이는 혼례를 치르고 나서 시댁을 바로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살림살이"는 이 시절 모든 딸들이 거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영이는 친정 어머니인 군위댁으로부터 본격적인 신부 수련을 하게 되었다.
잘 못 가르쳐 보내면 친정 부모를 욕 보인다며 꼼꼼하게 이것저것을 손잡고 가르쳐 준 군위댁이었다.
그녀는 딸에게
"장님으로 3년, 귀머거리3년,벙어리 3년을 살면 시집살이가 가장 좋다" 라고 말했다.그리곤 "출가외인이다"
"너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평상신씨 귀신이다.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 집에서 살아야 한다 "라며
정신교육도 하였다.
그녀는 해마다 사래 긴 밭의 한고랑은 늘 목화를 심었다. 딸이 넷이나 되었으니 혼수 중 제일 중요한 이불을 만들기 위해 해마다 목화를 심어 커다란 항아리에 모아 두었다가 딸이 시집갈 때면 포근한 솜이불을 만들어 보냈던 것이다.
영이는 엄마를 도와 살림을 도왔지만 시집에 가져갈 혼수를 준비하는데 주력하였다.
양재를 배워 이것 저것도 재봉틀로 기워 모았다.
베겟잇과 이불 호청도 만들고
햇대뽀에(벽에 옷을 주욱 걸어 놓고 먼지를 막는 용도)각종 수도 놓았다. 그 햇대뽀는 방의 한벽을 덮을 만큼 컸다.
양쪽 가장자리에는 봉황새를 마주 보게 하고 한땀한땀 수를 놓았다. 그리고 가운데는 꽃도 새겨 넣었다.
시간이 꽤나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수를 놓으며 새로운 시집살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서히 친정 식구들과 이별을 준비하면서
시댁에 적응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맏사위는 간간 처갓집을 다녀가곤 했다.
사위가 오는 날 군위댁은 몸을 사리는 모습이 새악시와 같았다. 어렵고 또 어려웠다.
각별히 옷도 차려 입고 버선도 고이 신었다.
씨암탉을 잡아 대접도 하고
계란이나 마른 반찬 그리고 비린내 나는 생선도 상에 올렸다
"사위는 백년 손님이다" 손님 중 제일 큰 손님이다 하면서 사위를 정중히 대접을 해서 보냈다.
아마 딸을 잘 부탁한다는 몸짓이었을 것이다.
얼굴이 뽀얗고 예절 바른 신씨 사위는 장인 장모에게 각별했고 ,첩실인 의성댁에게도 깎듯이 장모님 하고 불렀다.
그는 집에서는 7남매 맏이였고,처갓집에서는 10남매 맏이였다.
가을에 혼례를 올린 첫째 딸 영이는그 다음해 3월 춘풍이 불어올때 데리러 온 신랑과 함께 친정을 떠나갔다.
22년간 정든 친정을 떠나 가는 날
종달새는 높이 떠서 지저귀고 봄꽃들은 앞다투어 피어 올랐다.
친정집 옆 개울가 논뚝에는 산수유 꽃이 만발해서 환송을 하는 듯 했다.
하얀 광목에 수를 놓은 각종 살림살이와 이불. 시어른들에게 드릴 이바지음식과 산골살림에 적당한 혼수를 손에 들고 시댁을 향하고 있었다.
제28탄
화려하진 않았지만 시골 사람의 모습은 아닌 도회지의 사람인 듯한 중년의 여인이 선비양반네 집에 찾아 왔다.
집안 친척도 아니고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다. 삐까뻔적한 차림은 아니지만 한눈에 봐도 촌사람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선비양반네 사랑방 손님은 주로 남자들이거나 서당 학동들이 대다수였는데...
선비와 중년의 여인은 한동안 방안에서 긴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군위댁도 좀 있다 사랑방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저녁 무렵에 방에서 나와 친정이 윗동네에 있다며 종종걸음으로 윗동네를 향해 걸어갔다. 여름이라 돌담장 아래 흰백합꽃은 향기를 찐하게 내뿜고 있었다.
그 여인이 돌아간 후 선비양반은 올망졸망한 아이들에게 눈깔사탕을 한개씩 하사 하였다.
그 여인이 오면서 사온 것이리라.
그 사탕 맛을 본 며칠 후 선비양반은 의관을 정제하고 어디론가 외출을 하였다.
그는 늘 하얀 모시저고리와 바지에 흰 두루마기와 하얀 중절모를 쓰고 다녔다.
이 복장은 선비의 트레이드마크였다.중절모는 나이롱이 섞인 베이직 모자에 곤색 테두리가 둘러져 있었고 ,가방은 뚜껑을 열고 닫는 가죽가방을 들고 다녔다.
신발은 기분에 따라 하얀고무신이나 가죽구두를
신고 다녔다. 가까운 곳을 갈때는 고무신을 .
멀리 가거나 도회지를 갈때는 구두를 신었다.
가죽구두는 아이들을 시켜 구두약을 발라 광채가 나도록 닦게 하였다.
아버지가 외출 기미가 보이면 아이들은 슬금슬금 도망을 갔다 .
흰 고무신은 언제나 군위댁이 뽀얗게 닦아 사랑채 댓돌 위에 신기 좋게 돌려 놓았다.
이번 외출은 먼곳이거나 도회지이다.
선비양반이 먼 이발소에 가서 면도와 이발을 하고
와서 구두까지 신었으니....
선비가 도착한 곳은 허름한 도회지의 뒷골목에. 자리한 낡은 곳이었다.
주소 하나 달랑 들고 가서 그 집을 찾았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동정을 살피고 있는데 커다란 짐자전거에 짐을 태산같이 실고 들어오는 청년을 발견했다.
선비 양반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찾는 사람임을 알아 차리고 그 집을 들어갔다.
"길 가는 나그네인데 목이 마르니 물 한잔 주시요"
하니
그 청년이 공손하게 "목이 마르시군요. 물을 드리고 말구요 "하면서 시원한 보리차 한사발을 내어 주었다.
키는 아담하나 자전거에 그 정도의 짐을 실어 나를 수 있다면 생활력도 있어 보이고 성실하게 보여 점수를 주었다.
작은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가게 안으로 보니
살림집이 딸려 있었다. 그 가게는 철물점 비슷한 것이었다.
좀 있으니 선비양반 또래의 남자가 나왔다
인사를 서로 하고 대화를 나누는데 그는 평산신씨고 슬하에 자녀를 7남매를 두었다고 통성명을 하였다
그들 부자의 대화를 봐도 예절이 있어 보여 흐뭇한 마음을 안고 다시 집으로 돌아 왔다.
얼마전 백합꽃향기가 진동하던날 선비집을 찾은 도시의 여인은 그 집 문간방에 세를 든 여인이었고 선비양반의 딸과 도시의 총각을 이어 주는 매파였다.
선비양반은 개혼(처음으로 시키는 자녀결혼 )이라 사윗감을 직접 보러 간 것이다.
꽤나 꼼꼼한 선비양반은
신랑감이 성실하고
예절 바르고
됨됨이가 되었고
관상 또한 귀한 상이다. 그리고
딸을 굶기지 않겠다는 확신을 갖고 가난한 도시의 7남매 맏이에게 결혼을 허락한 것이다.
제 27탄
새미산 아래 자리한 생골마을은 토탈 아홉가구가 살았다. 양반선비댁은 두 가구에 속했다.
한가구는 군위댁이 거주하고
또 한가구는 의성댁이 거주했다.
군위댁은 여성스럽고 다소곳한 모습이었다면, 의성댁은 키가 크고 얼굴은 광대뼈가 툭 불거진데다 이는 뻐드렁니로 애써 입을 다물어야 입 속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성깔을 내 보일때면 눈에 흰자위가 희번떡해서 약간은 살기를 내 뿜었다.
그래도 어디가 좋았는지 선비양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았으니 희안한 일이다.
밤마다 그의 처소를 찾아든 선비였으니까...
아마도 겉모습이 아니고 속궁합이 잘 맞았을거라 추측을 해 볼 뿐이다.
추운 겨울 의성댁이 거주했던 옆 사랑채에는 겨우내 글 읽는 소리가 겨울 찬바람과 어울리며 허공을 맴돌았다.
공자 왈 맹자 왈....
설날이면 서당의 학동들이 양반선비를 찾아와 세배를 올렸다. 각자의 손엔 훈장님께 올리는 답례품이 보자기에 고이 싸서 들고와 절을 하였다.
교습비 대신 물품으로 감사의 인사를 대신하는 산골의 풍경이었다.
사라네 10남매는 설날이 되면 세뱃돈도 한푼씩 얻었고.서당 학동들이 갖고 온 진상품도 있어 너무 행복해 하며 설날을 보냈다.
이 진상품은 세배하러 온 모든이들에게 도루 대접하는 것이 되었으니 돌고 도는 세상과도 같았다.
설을 쐬고 나면 산골 마을은 서서히 몸을 풀고 새해 농사 준비를 한다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짜기도 하고 뒤주에 넣어 둔 씨앗들도 살핀다 .바닥을 드러낸 뒤주에 남은 벼는 싹싹 긁어 자루에 담아 방앗간으로 보내 춘궁기에 대비한다.
군위댁은 정월대보름 준비에 여념이 없다.
원체 부지런한 사람이라 봄부터 나물이란 나물은 다 말려서 뒤주의 한켠에 줄을 매고 매달아 두었다
아주까리.취나물.원추리 .토란줄기.고구마줄기.고사리.무청씨래기 등 등
군위댁은 일자 무식이어서 문자로 표기는 못했지만 용케도 필요한 물품을 잘 찾아 내었다
가마솥에 장작불을 때고 지푸리기로 묶어진 나물들을 삶아 낸다. 직접 농사 지은 들기름과 들깨가루를 넣고 나물을 볶아 내면 온 집안은 보름나물 덖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찹쌀과 콩과 팥 서숙,수수,를 불려서 가마솥에 채반을 깔고 그 위에 삼베보자기를 올리고 밥을 쪄낸다.
그 밥은 커다란 항아리뚜껑에 퍼 담아 장독대에 올려 두었다. 그야말과 오곡밥을 가득 담아 이날만큼은 배 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동네 친구들과 커다란 대나무소쿠리와 양푼을 들고 집집마다 들르면 찰밥과 나물을 담아 주어서
함께 나누어 먹으며 즐겼다.집집마다 밥맛과 나물맛은 같으면서도 많이 달랐다.
밤이 되면 어른들은 동네 어귀에 솔가지를 쌓아두고 대보름 달집태우기를 하고 ,아이들은 깡통에 돌멩이를 넣고 지푸라기를 뭉쳐 불을 붙이고 빙빙 돌리면서 공중에 던지고 놀았다.
깡통안 돌맹이는 땡그렁땡그렁 소리를 내고 쥐불은 공중에 포물선을 그리며 땅으로 내동댕이 처지고 있었다.
 
 
 
 

제 26탄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등하교의 어려움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느덧
졸업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더 이상 진학은 형편상 불가한 것을 알아 차린
사라는 희망이 사라졌다.
중학교 3학년은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학교 생활을 했다. 숙제는 옆 짝꿍 득이가 거의 해서 가져 왔고, 연필도 가지런히 필통에 깎아서 가져 와서 나누어 주었다.
바람이 쌩쌩 불어 오는 날 드디어 졸업식이 거행 되었다.
교장선생님의 훈사가 있고 나면 각종상이 주어졌다. 공로상.우등상 .개근상.3년개근상 등등...
3년 개근상 수상자는 상품이 아주 커다란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의 훈사에도 성실한 학생이니 앞으로 크게 성장할 사람이라 칭찬도 아주 대단하게 했다. 사라는 아무런 수상도 하지 못한채 학교와 이별의 시간을 맞이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잘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졸업식장은 이 노래가 시작되면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중에는 결국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3년간의 학창시절은 학우들의 협조와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민둥산을 푸르게 가꾼다고 해마다 식목일에 산에가서 나무를 심던 일도 있고
송충이를 잡는다고 집게를 가지고 산에 가서 봉지에 징그러운 벌레를 잡다가 송충이가 머리에 붙어 기염을 토했던 일도 있고
겨울 추위를 이긴다고 전교생이 산으로 가서 작은산을 산 위에서 스크럼을 짜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면 토끼가 학생들에 포위되어 친구의 후리아 치마 밑으로 들어와 깜짝 놀란 일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집이 멀어 숙제할 시간이 없다고 숙제를 대신해 주던 미숙이,  학용품을 3년간  나누어 주던 옆짝궁 경득이,방긋 웃는 얼굴이 해바라기를 닮은 향숙이는 늘 간식거리를 나누어 주었고,홀어머니와 살던 말숙이는 자주 집으로 초대해서 밥을 주기도 하였고 , 작지만 야물딱진 은숙이는 약국집 딸로 배가 아픈 사라를 위해 약을 갖다 주기도 했고 3년간 하루같이 함께 등교했던 순이와 경숙이는 무거운 가방도 들어 주기고  하고 등하교길에 나를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키가 큰 남숙이와 해준이는 사춘기가 와서 서로 사랑의 싹을 키우다가 담임선생님께 호되게 야단도 맞았다.
사라는 무엇인지도 모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정든 아이들과 선생님과 헤어진다니 너무 슬펐다.
60명의 졸업생들 중 절반은 진학을 하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학교와의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등교할 일이 없어지니 몸은 너무 편하고 좋았다.

큰 언니는  신부 수련 중이었다.군위댁이 밥하는 것과 반찬하는것과 세탁하는법 .바느질하는법등을 가르쳤다.  엄마를 도와 살림을 도맡아 살았다.
그 중에 양재를 배워 옷을 만드는 기술도 익혀 동생들 옷도 지어 입혔다.양반 선비가 가사노동을 일체 하지 않으니 군위댁은 반머슴의 일을 도맡아 했다.
디딜방아를 찧기도 하고 ,길쌈도 하고,밭농사도 짓고 ,소도 키우고, 아이들 뒤치닥거리도 하였다.
어느날 군위댁이 급히 디딜방아를 찧어야 하는데 찧어줄 사람이 없었다
사라는 해보겠다고 자원을 했는데 무거운 방아는 사라의 몸무게로는 디딜방아를 올릴 수가 없었다.지붕에 묶어져 있는 줄에 매달려 콩콩 뛰어 봐도 꿈적도 하지 않았다.
군위댁과 역할을 바꾸려 해도 손으로 곡식을 뒤집어야 해서 그것도 어려웠다. 부족한 몸무게를 보태려고 납작한 돌을 머리에 이고 방아를 찧으니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에궁 !왜 이렇게 안 크는 거야  키도 빨리 크고 싶고 몸무게도 팍팍 늘려서 엄마를 도와주고 싶은데

#소설 아닌 #소설 쓰기
제 25탄

#배가 #벌떡 #일어나네

군위댁의 웃음은 좀 체 찾아 보기가 힘들었다.
아니
웃을 시간도 없었고
웃을 일도 없었다는게 맞는 말이다.
부처도 돌아 앉는다는 씨앗을 두고 살았으니 오죽했겠는가?
입이 짧아 식사를 잘 못 하는 군위댁은  구정 설을 쐬고 나면 입맛을 잃어 버려 식사를 거의 할 수가 없었다.
어릴적 간난함에 배불리 먹지 못했으나  양반 선비한테 시집을 와서는 굶지는 않았다.
시부모들이 가진  토지는 밥은 먹게 해 주었지만
군위댁은 입맛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몸은 빼싹 말라 고목에 가느다란 줄기와 잎이 생기를 잃고 매달려 있는 모습이었다.그녀는
오직 입맛에 당기는 음식이 한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밀농사를 지어 방앗간에 가서 빻아 놓고 국수를 만들어 먹는 것이었다.
밀가루에 생콩가루를 한줌 넣고 반죽을 했다
커다란 옹기 뚜껑에 물과 소금을 넣고 치대어 되직한 반죽이 완성 되면 커다란 안반에 반죽 덩어리가 내려 앉았다.
빼싹마른 군위댁은 홍두깨로 반죽을 살살 밀어 대었다. 한바퀴 돌아가면  반대로 또 말아 밀어대었다.  이 때 반드시 마른 밀가루를 한꼬집 뿌리고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른다.
이 작업이 여러 번 하다보면 얇은 면이 만들어졌다. 왕골자리에 크고 둥그렇고 얇게 펴진 면을 널어 수분을 말린다. 이 면은 반에서 반으로 접어 들어가면 칼질을 할 수 있게 접혀졌다.
길다랗게 접힌 국수면은 도마위로 옮겨지고 능숙한 칼솜씨로 쓱싹쓱싹 국수면이 되었다.
사라는 너무 신기한 엄마의 칼솜씨가 신기하기 그지 없었다. 군위댁이 면을 썰다가  끝 부분을 잘라서 주면  국수육수를 끓이고 있는 부엌으로 가서 불 위에 면 조각을 올린다.
시간이 지나면 면은 봉긋하게 익으면서 부풀어 올랐다. 바삭 바삭한 밀가루면 직화구이 맛은 그
시절 최고의 과자였다.  이 면 짜투리도 운이 좋아야 얻어 걸리는 주전버리꺼리였다.
간식이 없던 시절이라 맛보다는 군것질하는 재미가 좋았다. 아이들은 먹기 싫은  국수라는 음식이었다.
왜소한 군위댁은 자기 몸에 비해 너무나도 큰 안반과 홍두깨를 날렵하게 다루었다.
국수가  큰 가마솥에서 끓어 오르면 시골 초가삼칸집은 구수한 냄새로 온 집안을 감싸고도 남았다.
군위댁은 이 손칼국수 한그릇을 후루룩 마시듯 먹고 나서 "아이구,드디어 배가 벌떡 일어 나네" 하였다.
한줌밖에 안 되는 군위댁의 허리는 직접 만들어 먹는 국수 한사발이 허기를 면해 주는 유일한 음식이었다
사라는 군위댁의 국수사랑을 보고 자랐기에 어느날 국수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엄마인 군위댁이 일터로 간 사이  반죽을 하고 자신보다  큰 안반을 대청마루에 깔고  왕골자리를 펼쳤다.
홍두깨는 사라의 키보다 컸지만 엄마를 흉내내 밀어 대었다
이리 저리 삐뚤 빼뚤 밀었다. 사이 사이  마른 밀가루도 뿌려 대었다.
면을 접어 칼질을 했다. 칼도 도마도 홍두깨도 안반도 땅꼬마 사라에겐 거대한 도구였다.
면발은  제멋대로였다 .
가마솥에 우물에서 길러온 물을 붓고 국수를 삶아 군위댁이 일을 끝내고 집에 오자마자 국수를 대접을 했다.
면발은 짧고 울퉁불퉁했고 면은 불어 터졌지만
깜작 놀라며 맛있게 드시고  군위댁은
"아이구 맛있다.배가 벌떡 일어나네.다 컸구나 " 하며  빙그레 웃음을 보여 주었다.
아주 보기 힘든 군위댁의 웃음이었다.
이 때 나이 17살이었고
사라의 손으로 직접 대접한 첫 음식이자 마지막 음식이었다.

#소설아닌소설쓰기
제 24탄

#나의 #세뱃돈은 #남아 #있을까?

섣달 그믐날의 사라네 집은 시끌벅적 하다
군위댁은 지난 장날 튀겨 온 쌀과 보리쌀을 커다란 통에 담고 조청을 한 바가지 부어 골고루 섞는다 .그리곤
커다란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놓고  직접 만든 조청에 버무린 쌀튀밥을 얇게 펴서 놋그릇 밥뚜껑으로 쓱쓱 펴서 굳으면 부엌칼로 적당한 크기로 썰어 소쿠리에 담는다
칼과 솥뚜껑이 만나 내는 금속성 소리는 이상하게도 상쾌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깨를 볶아 만든 깨강정도 조금 만들고
들깨강정과 콩강정도 조금 만들었다 .
식혜는 기본 명절 음식이었다.
이것은 시아버지와 선비양반 그리고 사랑방 손님이 올때 내는 귀한 음식이었다.
거기다가 제수용 음식 준비로 온 집안은 잔치 분위기였다.소실인 의성댁도 함께 거들었다.
10명의 아이들은 설날이 엄청 기다려진다.
아이들은 설빔으로 사준 옷을 만지작 거리며 설날을 기다리며 연신 부엌을 들여다 본다. 군위댁과 의성댁은 "아이들에게 저 바깥에 나가 놀아라"하면서도 인심을 쓰듯 자투리 강정을 한개씩 나누어 주었다.
조기를 굽는 냄새와 전 굽는 냄새도 진동을 한다.
사라는 명절이 와도 한편으로 기쁘지 않았다. 언제나 나의 옷은 두명의 언니가 입다가 물려 준 낡은 옷이었다.
팔소매와 팔꿈치 그리고 무릎은 군위댁이 꽁닥꽁닥 기워서 주었다.
언제 나도 새 옷을 입을 수 있을까  위에 두명의 언니가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음식 준비가 거의 끝나 가면 연례행사인 목욕을 시작한다.
소죽을 끓이는 가마솥을 깨끗이 씻어 내고 거기다가 불을 때어 목욕물을 데워 가족 모두가 재계를 하듯 묵은 때를 씻었다.
이 목욕도 서열대로 하였다.
제일 먼저 할아버지가 하고 그 다음은 선비 양반 그 다음은 큰아들부터 시작해서 아들들이 먼저 씻었다 그리고 큰딸 부터 시작해 차례대로 하였다
사라는 거의 마지막에 순번이 돌아 왔다
집안에 있는 우물물을 길러와 물을 데웠으니 이날은 두레박도 꽤나 힘들었다.
소죽솥은 대청마루 아래에 걸려 있었고 아궁이는 마당에서 아랫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 곳이었다. 뜨거운 물에 앉아 있어도 섣달그믐날의 바람은 살을 에는 듯 하여 추웠다
겨우내 씻지 않아 손등은 터서 피가 나기 일쑤였다. 몸도 통과의례처럼 씻는 것이었다.
묵은때는 여름날 개울에 가서 씻을 수 밖에 ....

밤에는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는 큰언니의 말에 밤을 새우려 작정을 했으나 잠이 들어 버렸다
군위댁이 아이들을 깨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짖궂은 언니가 동생들 눈썹에 밀가루를 발라 두고
"얘들아 일어나 봐  느그들 잠을 자서 눈썹이 다 세었다 "하니 군위댁이 여러번 깨우는 것보다 빨리 일어 났다.
친절하게 손거울 까지 갖다 놓고 보라는 것이다.
거울을 본 동생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정월초하루 날 울음소리가 나면 양반선비가 용서를 못할 일이 벌어졌다.
군위댁이 얼른 일을 수습했다
"괜찮아, 물로 씻으면 깨끗하단다"
순식간에 밀가루가 없어진 걸 보고 형제 자매들은 깔깔 거리며 정초를 맞이한다
새옷으로 갈아 입는 형제자매도 있었으나 사라는 헌옷이지만 세탁해 준 옷을 입고 설날을 맞이 하였다
아침 차례가 끝나면 선비양반이 제수 음식을 음복이라 하며 접시에 조금씩 썰어 각자 한접시를 나누어 주었다.
이때는 남여의 차별도, 적서의 차별도 없었다.
배 불리 밥을 먹고 나면 세배를 올렸다
이때는 또 차별이 있었다
선비양반이 의관을 정제하고 할아버지께 세배를 올리고 나면 할아버지는 덕담을 하였다.
"올해도 건강하시고 가정도 잘 다스리시게"
하고 나면 선비양반이 세배를 받는다
아들 여섯이 절을 하고 세뱃돈을 한푼씩 받고 나면 그 다음은 딸이 순번을 얻었다
사라는 세째딸이니 9번째이다.
아버지의 바짓단 손의 복주머니에 그때까지 돈이 남아 있을까 ? 걱정이 되었다
세배에는 뜻이 없고 세뱃돈에 관심이 큰 사라였다.


#소설아닌소설쓰기
제23탄
#쳐부수자공산당.#때려잡자 #김일성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등교전쟁은 치열했다.
꼬꼬마 사라는 짐짝처럼 떠밀려 버스안으로 들어갔다.
푸른 베레모와 파란 가운을 걸쳐 입은 차장은 사람들을 짐짝처럼 버스 안으로 디밀어 넣었고,그녀의 커다란 주머니에 동전은 어느덧 배가 불러지기 시작했다. 어느때는 주머니가 불룩한 차장언니가 부럽기도 했다.아버지의 주머니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초겨울 날씨가 제법 을씨년스럽게  추운 날 전교생을 운동장으로 집합 시켰다 . 교감 선생님이 대통령각하께서 우리 국민이 나아갈 길을 이 헌장에 담았다며  훈사를 한 후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는데 매우 위대한 행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그 헌장을 학생들에게 외우게 하려는 것이었다.그것도 오늘 중으로 전교생이 다 외우라는 것이었다. 상명하복이 대세였다.전교생이라 해 봐야 모두 180명이 전부였다. 학생회장이 연단에 올라  헌장을 낭독했다.뭐가 뭔지는 잘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주입식교육이 지상목표였을때니까 말이다.
전교생 중에 빨리 외우는 학생에게 상품도 있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1968년 12월5일 대통령 박정희"
교실에 돌아와 전교생은 뜻도 모르는 헌장을 외워 대었다.한시간도 되지 않아 1학년에 재학중인 용재가 1등으로 외웠다.그리고 사라는 2등으로 외웠다.상품은 공책이었다 1등은 세권이었고 2 등은 2권, 3등은 1권이었다.
이 두 학생은 양반선비의 아이들이었다.
사라가 아주 어린시절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났던 배다른 동생이 용재였다. 용재는 덩치가 커서 자전거를 타고 중학교를 다녔다. 어린 시절 사라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용재는 공부를 꽤나 잘하는 아이였다.
  새벽이면 동이장이 찌지직거리는 앰프를 틀어 대었다  "새벽종이 울리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 노래가 흘러 나오면 주민들은 하나 둘씩 비자루를 들고 마을길을 쓸어 내고 있었다.
국민교육헌장은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길 이라고 가르쳤다
국어시간에는 표어를  짓게 하고 ,미술시간에는 표어를 그리게 하였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 부수자 공산당" "공산당이 싫어요. "등 그러다가 어느 날은  쥐를 잡자는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미술시간은 쥐를 그려 대기도 하였다. 그것까지는 할만 했으나 숙제로 쥐를 잡아서 꼬리를 학교에 가져 오게 하였다.
선비양반네 아이들은 열명이나 되니 쥐꼬리를 학교에 가져 가야 하는 날은 비상이 걸리는 날이다
쥐를 잡으려고 쥐틀을 놓기도 하고,쥐약을 놓기도 하였지만 숙제물로 가져 가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군위댁은 울며 불며 쥐꼬리 타령하는 아이들을 위해 대안을 마련했다 모자라는 쥐꼬리는 오징어 다리가 대신했다.
오징어 꼬리를 물에 불려서 물기를 닦고 빨판은 떼어 내어 종이에 돌돌 말아 주었다.그러면 아이들은 진짜 쥐꼬리인 줄 알고 학교에 제출 하였다.다행히 선생님은 그걸 뜯어서 확인 하지는 않았다.
  증산운동도 한창이었다.실제로 땅 1평 갖기 운동도 하였다.사라는 집 뒷동산에 땅을 만들어 부추를 심었고 울타리에는 호박을 심었다.
물론 군위댁이 가꾸긴 했지만... 학교에서
등사지에다 호박이며 옥수수며 감자를  테두리를 그려 주었다.거기다가 색칠을 해서 집에  잘 보이는 대청마루 벽에 떡하니 붙이는것이  숙제였다.
가장 좋은 자리 대청 마루 기둥엔 양반선비가 쓴  立春大吉 建陽多慶이 있었고 반공포스터와 증산포스터  그리고 아이들 낙서까지 과거와 유신이 한데 널부러져 있었다.

#소설아닌 #소설쓰기
제22탄
#지각대장 #삼총사

사라의 자취생활은 끝이 났다.
통학도 쉽지 않았지만 자취도 만만하지 않았다.
룸메인 순이는 키가 꺽다리처럼 컸고 사라는 땅강아지처럼 작았다. 그녀는 늘 맑은 콧물이 졸졸 흘렀다. 홀짝홀짝 콧물을 들이키는게 그녀가 하는 일 중 꽤 중요한 일과였다. 처음으로 집을 나와 사는게 그렇게 힘들고 외로울 줄이야...
본채에 사는 주인 아주머니가 특별식을 할때 더욱 집이 그리웠다.그녀가 동지 팥죽에 넣을 새알을 비비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엄마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저녁 늦게까지 기다려도 팥죽을 주지 않았다. 둘은 겨우 궁뎅이 하나 뎁힐만한 아랫목에 누워 노래 아닌 노래를 불렀다."아이고 팥죽 먹고 싶어" 하며  즉흥적으로 음을 넣어  노래를 불러 대었다
지성이면 감천....
주인 아주머니가 양은냄비에 팥죽을 가득 담아 갖다  주었다.
순이는 엄마가 일찍 죽고 새엄마와 살았는데 늘 사랑이 그리운 아이였다. 아버지가 술집에 다니면서 술집작부를 데리고 와서  동거를 했다.살림에는 별 뜻이 없고 재산에만 관심이 있었다.
전처가 낳은 순이는 키는 컸지만 야위었고 언제나 속에서 찬바람이 새어 나오는 아이였다. 새엄마는 늘 순이를 구박했고 자기가 낳은 아이를 싸고 돌았다.처음에는 자취생활이 더 좋다는 순이가 집으로 가겠다니 사라도 철수를 해야 했다.
  다시 깊은 산골로 돌아 간다고 생각하니 한편 좋기도 하지만 날마다 등교할 일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군위댁이 있는 산골집으로 가니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 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가?
양반 선비가 세째딸에게 처음으로 보내준 중학교가 아닌가.?
늘 소화기가 약해서 먹기만 하면 설사를 하는 체질이라 원거리 통학이 어려웠다.그래도 공부는 해야 했다.안 그러면 퇴학을 시킬 것 같았다. 아이는 조그만한데 학습의 양도 많고 책가방이 너무 힘에 겨웠다. 그리고 새벽에 나가는 버스 한대가 전부라 차를 놓치면 삼십리길을 걸어가야 했다.
버스는 미어 터지게 사람을 태웠다.파란 가운에 베레모를 쓴 차장이 사람들을 밀어 넣었다. 짐짝처럼... 숨을 쉬기가 어려운데 차가 출발하면 흔들리면서 자리가 좀 생기는 듯 했다.
군위댁은 사라의 동생에게 부탁을 하였다."복순아 언니 책가방 하나 니가 들어 "하면 순순히 가방을 들어 주었다.
그럭 저럭 3학년이 되었다.어느정도 통학도 이제 이골이 났다. 선비양반의 형편에 사라는 진학은 꿈을 꿀 수가 없었다. 학교가는게 의미가 없었다 공부도 적당히 하니 성적도 점점 떨어졌다.
산골 마을에 유일한 여학생. 사라. 순이. 경숙은 모두 중학교를 끝으로 졸업을 해야 했다
그도 그럴것이  여자애가 중학교를 가는 것도 처음인데 고등학교라니 상상이 안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군소재지나 대구로 나가야 가능하니 아니될 일이었다.
선비양반의 형편도 그렇지만 여자애를 혼자 내 보내는건 더욱 허락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학교는 잊을만 하면 한번씩 지각을 했다. 토탈 49번의 지각을 하고 얻은 별명은 #지각대장 #삼총사 였다
땅콩 .땅강아지. 땅개.에 이어 지각대장삼총사까지 얻은 사라였다
세명의 여자애들은 학교 가는 길에 볼것 안볼것 다 보고 재잘거리며 등교를 했다.학교를 가는 건지 소풍을 가는건지 모를 일이다. 그냥 갔다가 오면 그만이었다
선생님들이 처음에는 야단을 쳤지만 나중엔 "그래 결석은 하지마라 "하며 관대해졌다.
스승의 날 행사는 시골 학교에서 제법 큰 행사였다.아이들이 먼저 등교해서 교문에 양옆으로 서서 선생님들이 오면 가슴에 "스승님 감사합니다"라는 리본을 달아 주고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나 가르쳐 주신 스승의 은혜는 어버이시다"하며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날도 사라와 두 친구는 선생님들과 함께 교문을 들어섰다. 친구들이 불러주는 노래가 고문이었다.거기다가 양옆에 도열해 환영을 받으며 통과를 해야 하다니...

●#소설아닌소설쓰기
제21탄
#걸인의죽음과 #군위댁

동네 아이들이 시끌벅적 하는 소리가 산골마을을 뒤흔든다. 남루한 옷차림과 헝크러진 머리카락을 한 여인은 배가 태산같이 불러 있었다.매서운 겨울 날씨에 꾀죄죄한 옷을 입고 그 위에 이불을 걸치고 있었다.손에는 밥을 얻어 담는 깡통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누가 봐도 거지였다.
이불 사이로 보이는 그녀는 배가 남산만큼 불러 있었다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걸뱅이가 애를 배었대"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 있는 것을 보는 듯  놀려 대었다. 여인은  정신지체를 갖고 있었고 걸식을 하고 아무곳에서나 잠을 자니 아마도 못된 남성들이 건드려 임신을 시킨 것이리라. 얼굴에는 표정이 없고 단지 배고프면 얻어 먹는 것이 전부였다. 사라는 집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전후사정을 이야기했다
군위댁은 그 여인을 집으로 오게 해서 따끈한 밥상을 차려 주었다.그리고 입은 옷을 벗기고 집에 있는 옷 중에 도톰한 옷을 갈아 입혀 주었다.추운 겨울에 아이를 낳으면 안될 것 같아 사랑채에 머물게 하였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가족과 암소를 돌보는 군위댁이 일어나 방에 가보니 그 여인은 집을 나가고 없었다. 사라는 그 여인이 어디서 아이를 낳을까 ?그 아이는 어떻게 할까?  그리고 아이들이 놀리고 돌멩이를 던지면 어찌할까 ? 걱정이 되었다. 수심에 찬 사라를 보고 군위댁이 말했다.
  "나는 열아홉에 시집을 와서 거지 세명을 장례를 치루었다.느그 할매가 자애로왔거든 .집에 오는 걸인들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어 . 어떤 걸인은 밤에 와서 재워 달라고 하면 허락을 하셨지. 저녁밥을 지어 먹이고 방에 군불을 때서 재웠어" 사라는 배가 남산만한 여인 거지생각은 어디에 가고 군위댁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그래서 그 다음은요"하니  "이가 너무 많았어 그래서 옷을 갈아 입히고 소죽솥에 물을 뎁혀 목욕을 하게 했지.그리고 옷을 갈아 입혔어. 그가 입은 옷은 개꼬리로 만든 비자루로 소죽솥 앞에 놓고 쓸어서 불에 집어 넣었어 .그리고 옷을 삶아 솥뚜껑에 말렸지."
아침에 밥을 먹이려고 가니 죽어 있었단다. 새댁인 군위댁은 가뜩이나 겁이 많았는데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어른들이 알게 되고 나서 동네사람을 불러 장사를 치루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세번씩이나 말이다. 간단하게나마  의식을 갖추어 장례식도 올렸다. 그리고 관 대신에 이불을 돌돌말아 지게에 지고 가서 동네 사람들이 함께 묻어 주었다고 했다.
  남한테 잘하면 그 복은 자손들이 받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라의 할머니는 자식을 낳으면 자꾸 죽어 버리니 생명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겨우 남매를 키웠는데 그 중 남자가 양반 선비였다.  얼마나 애지중지 자녀를 길렀는지 양반선비는 자기 몸뚱아리를 최고로 여겼다.조금만 아파도 엄살이 심했고 몸을 금쪽같이 여겼다.
거지의 죽음을 세명이나 거두어 장례를 치룬 공으로 사라네 가족은 처첩이 낳은 자손이 열명이나 되었으니 할머니의 소원은 이루어진 것이다.

●#소설아닌소설쓰기
제 20탄
#암탉수탉이 #상위에 #오르고

작은 산골 마을 아낙네들은 부산하게 움직인다. 머리엔 하얀 광목천을 잘라 손으로 꿰멘 두건을 쓰고, 허리에는 앞치마를 둘렀다. 전을 부치는사람, 잡채를 하는 사람, 술안주용 마른반찬을 만드는 사람 , 마을 공동 재산인 그릇을 빌려와 씻어 소쿠리에 씻어 엎어 두고 작은 상도 여러개를 준비하는 사람 등 등...
  남정네는 양반 선비의 서당 앞 개울가에서 돼지와 한바탕 전투를 벌인다.살고자 발버둥치는 돼지에 올가미를 씌우고 모가지 옆을 칼로 베어  기어이 명을 마치게 한 후 해부작업을 해서 잔치집 국솥 앞으로 가져와 먹기좋게 잘라 준다.국솥은 남정네 즉 학동들이 임시로 바깥에다 걸어 두고 땔감도 쪼개서 대령을 한다
솜씨 좋은 동네이웃이 국을 준비해 두면 불은 남정네들이 때었고 음식 배달도 그들의 몫이었다.
   오늘은 양반선비와 군위댁 사이에 태어난 맏딸의 혼례를 위하여 마을사람들이 모두 나섰다. 군위댁은 41세였고 선비양반은 39세 였다.양반 선비는 사윗감을 고를때 나름 지침이 있었다. 첫째는 양반가문이라야 했고 둘째는 효성이 있는 사람인가 였다.마지막은 성실한 사람을 찾았다. 과년한 딸이 있으니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 왔다. 선비양반의 심사는 나름 까다로왔다 .우선 양반인가 를 알아본 후 아니면 무조건 퇴자를 놓았다.어느날 혼사가 들어온 곳은 평산신씨로 1차 관문은 통과했다.흰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신랑감을 찾아 가서 그의 모습을 관찰하고 와서는 다짜고짜 맞선을 보고 바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그 사윗감은 가난한 집의 7남매 맏이였다
짐자전거에 커다란 짐을 가득 싣고 들어오는데 그 모습이 무얼해도 딸을 굶기지 않겠다는판단이 선 것이었다.거기다가 부모님한테도 너무 공손하더라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 온 양반선비는 일사천리로 혼사를 치루게 되었다.딸의 의견 따위는 물어 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여자는 삼종지도를 따라야 한다는게 그의 지론이었다. 맏딸 영이는 신랑 얼굴을 맞선 자리에서 한번 보고 혼례청에서 두번째 보는 것이었다
야단법석인 사라네 마당은 혼례상에 올릴 암닭과 수탉을 청홍색 수건으로 싸서 묶어 올리고, 나무로 된 기러기 두마리와 양 옆에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화병에 꽂는다.
신랑신부가 절을  예식에 따라 하고 나면 비로서 부부가 됨을 인정하는 것이다.사라는 왠지 언니를 그 낯선 사람에게 뺏긴다는 생각이 들어 혼례가 끝나자마자 뒷동산에 올라  집을 내려다 보았다. 무조건 그 남자가 싫었다.
왜 그리 서운했는지 한참을 울다가 집을 내려다보니  온 동네 아이들이 다 우리집에 모였다.엄마들이 일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날 만큼은 배불리 맛난걸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돼지는 어느새 시뻘건 국으로 변해 있었고, 커다란 가마솥의 하얀밥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온 동네 사람들과 하객들을 배부르게 하였다.
사모관대를 쓴 그 남자와 왕비같은 복장을 한
언니가 눈에 아른 거렸다
신랑신부가 덮는 이부자리는 군위댁이 몇년에 걸쳐 지은 목화솜으로 만들었다. 문 창호지도 새로 바르고 ,도배도 깨끗하게 한 방에서 첫날밤을 치루는데 온동네 아이들과 짖궂은 주민들이 침을 발라 문에 구멍을 내어 안을 들여다 보았다.

●#소설아닌소설쓰기
제19탄

#이상한 #프로포즈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룩거리며 학교를 다니는 덕주는 장난꾸러기 남자아이였다.  담임선생님은 자리배치가 특별했다.한 책상에 남학생과 여학생을 앉게 하고 그 뒷자리는 여학생과 남학생을 앉게 하였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서로 교차되게 만들었다. 이유는 떠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성깔이 사나운 담임은 사정없이 때리기 때문에 숨을 죽이고  학교생활을 했다. 그 아이는 쉬는 시간에도 나를 괴롭혔고 공부시간에도 나를 괴롭혔다.연필을 뾰족하게 깎아서 나의 팔 뒷쪽을   찔러 대었다. 쉬는 시간엔 저항이라도 했지만 공부시간에는 아파도 참아야만 했다.소리를 질렀다가는 사정없이 매를 맞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팔 뒷쪽에 연필심의 흉터를 만들었다.그러다가 그도 진학을 하고 사라도 진학을 하였다. 그는 늘  나에게 괴롭힘이나 선물로 나의 환심을 사려 노력하였다.
  통학이 어려워 자취를 했으나 어느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엄마를 떠나 생활한다는게 예삿일이 아니었다.윗채에 사는 과부댁이 특별한 요리를 하는 날은 더욱 집이 그리웠다. 순이랑 둘이서 이불을 덮어 쓰고 "아이고 먹고 싶어라" 라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과부댁이 음식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반찬이라해야 군위댁이 해 준 #무우오그락지김치 와 짠지였고 된장과 고추장이 전부였다. 하루는 된장국을 끓이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순이가 말했다.바로 담장 넘어 주인이 뽑아 가지 않고 내버려 둔 배추가 서너포기가 있으니 그걸 가져 오자는 것이다. 키가 큰 순이가  밭에서 뽑아 담벼락 안으로 넘겨 주고 사라는 안쪽에서 받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키가 작은  사라는 바께쓰를 엎어 놓고 배추를 받았다. 심장이 콩닥콩닥거렸다. 그걸로 된장국을 끓였는데 정말 맛이 있었다. 집에 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식재료인데 자취를 하니 귀한 것이었다.
학교는 과목마다 선생님이 바뀌니 너무 색다르고 좋았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니 호기심은 더욱 부풀어 올랐다. 몸이 작고 허약한 사라는 여기서도 땅강아지 혹은 땅개라는 별명을 유지 했다.같이 중학교로 진학한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은 "야 엄마젖 더 먹고 와라" 하면서 안아 주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공부는 할만 했다.그런데 유독 안 되는것은 체육과 미술이었다.체육시간이 되면 큰 아이들과 부딪히는 운동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달리기 던지기 매달리기 등 등 ...
하루는 100미터 달리기를 했다 .정말 열심히 뛰었다고 생각했는데 담임선생님 왈 "넌 걷는 거냐 뛰는 거냐"하였다.
중학교는 분교였고 전교생은 180명이었다.
한학년이 60명 한반이었는데 여학생은 4분의1만 배정했다.그리고 교장은 본교에 주로 있고 특별한 날만 분교로  왔다.교감이 교장역할을 하는 것이었다.교감선생님이 미술을 가르켰는데 1년 내내 운동장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풍경을 보고 그리게 했다. 사라는 웅덩이를 동그랗게 그리고 그 옆에 늘어진 버드나무를 그렸다. 그리고 하늘엔 흘러가는 구름을 집어 넣었다. 그러나 스케치만 했을뿐 완성을 못해서 끙끙대고 있었다.덕주는 미술시간마다 여기는 빨간색으로, 저기는 파란색으로 하며 사라의 그림에 훈수를 두었다.  사라를 엄청 좋아했던 아이 덕주는 명랑하고 장난이 심한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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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탄

#새로운 #첫경험
꽤애액 ~~
기차의 요란한 기적 소리가 새벽을 깨운다.
가마솥 여닫는 소리 ,부엌에서 알루미늄 도시락 달그락 거리는 소리 ,암소의 울음소리 .장닭우는 소리 ,군위댁의 아이들 깨우는 소리 대신 기적소리가 울린다
몇달간의 통학은 지옥과도 같았다
새벽에는 가방을 여러개 들고 콩나물 시루같은 버스를 타야 했고 하교 후는 삼십리길을 걸어가야 하는  강행군을 했다.
하교길은 쉬어가는 곳이 여러곳 있었는데 한번은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리는 장면을 보기도 하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여중생 세명은 얼마나 웃었는지 배꼽이 빠질듯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두마리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공모양으로 뭉친다음 뒷다리 사이에 끼우고 물구나무를 선체 굴러가니 어찌 우습지 아니한가.? 웃기만 하면 소녀의 감성으로 봐 줄만 하겠지만  무슨 심술보가 터졌는지 경숙이는 발로 쇠똥을 문질러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그러면 쇠똥구리는 다시 쇠똥을 뭉쳐 공처럼 뭉치곤 하였다.
   농번기가 오기전 시골 총각들은 먼산에 나무를 하러갔다.학교를 다녀 오는 길은 멀기도 하였지만 볼것도 많았다 .총각 여러명이 지게에 나무를 지고 오는 길이었다.그 지게 위에는 진달래 꽃봉오리가  수줍은듯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소녀들이 "꽃 한송이 주세요"하니 한 나무꾼이 말 하였다.집에 언니 있는 사람부터 준다는 것이었다. 사라는 용기있게 손을 번쩍 들었다. "우리집에 언니가 두명 있어요" 하니 지게를 받히고 꽃을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어쩌랴 서로 낯이 익지 아니한가?
그는 양반선비의 서당에 다니는 학생이었다.그 나무꾼은 통사정을 했다  .절대로 집에 가서 자기가 한말을 훈장님께 일러 바치지 말라고 하면서 진달래 꽃다발을 모두 건네 주었다.오는 길은 마냥 행복했고 그 중 피어 있는 꽃을 따서 먹으며 집으로 왔다.입은 보랏빛으로 물 들인채...
그리고
하교길은 개울을 꼭 지나야 하는 코스였다. 동네 아낙들이 나와 방망이를 토닥거린다.마치 장단을 맞춘 듯 톡닥톡닥 토닥토닥 하는 소리가 연주회를 하는것 같다 .빨랫터는 동네 아낙들의 소통장소이자 소문의 진상지였다.누구집에 손님이 몇명 왔는지, 숟가락이 몇개인지,  확인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교하는 사라의 친구 두명과 개울을 건널라치면
늘 하는 말이 있었다
"느그들 한창 좋을 때다 .우리 때는 학교가 뭐꼬. 한글도 못 배웠는데  가스나들을 중학교까지 시켜 주니 느그는 복 많이 받았데이" 하며 부러워했다.  힘들어 하는 사라를 본  양반선비는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주었다.제일 걱정이 "여자와 바가지는 내돌리면 깨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가 큰 용단을 내린 것이었다.
학교 근처에 허름한 시골집 방한칸이었다.
흙집으로 된 방이었고 난방은 연탄으로 하였다.밥은 그 연탄위에 냄비를 올려서 해 먹어야 했다
키가 큰 순이도 키가 작은 사라도 어렵지 않은게 없었다.한겨울에 연탄불은 꺼지기 일쑤였고 .밥은 제대로 되는 날이 드물었다.
윗채에는 과부댁이 아들 두명을 키우며 살았는데 그녀는 교회의 집사였다.언덕위에 자그마한 교회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우리들은 연신 유혹했다. 교회에 오면 사탕도 선물도 준다고 말이다.
산골짜기 집 근처는 교회도 절도 없었다.읍내로 오니 처음 보는 교회는 생소하기 그지 없었다.
과부댁 집사님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지만 교회를 거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불이 꺼지면 연탄불도 붙여 주었고 특별한 날은 음식도 건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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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탄
#총알이 #빗발치는

삭풍이 부는 겨울이 지나가고 아지랑이가 몽글 몽글 피어 오르는 봄날 ,새벽부터 동네 아주머니들이 주먹밥을 싸느라 부산하다. 봄이 오면 산골 마을은 냉이며 쑥을 캐러 여인들이 삼삼오오 들로,산으로 다닌다.  종달새가 높이 올라 "지리 지리 지리리"울어대면 생명의 환희가 시작되는 것이다
  날이 풀리고 먼산에 눈이 녹으면  보따리며 소쿠리를 챙겨서 동네사람들이 함께 산나물을 뜯으러 집을 나선다.
군위댁은 오늘 큰딸이 선을 보는 날이라 불참이었다.사라는 엄마를 졸라서 주먹밥을 싸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산에 나물을 뜯으러 갔다.나물이라 해 봐야 몇가지 밖에 모르는 10대 소녀이지만 군위댁이 해 온 나물을 많이 봐 온 터라  자신 만만하게 따라 나선 것이다.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은  멸치볶음에 짠지를 총총 썰어  넣은 주먹밥에 물 한병이었다.
먼길을 걷고 또 걸어 간 곳은 제 3사관학교 근처였다.산나물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 근처에 주로 있었다. 어른들이 뜯는 것을 보고 따라 다니면서 하나 둘씩 허리춤에 찬 다래끼에 넣었다. 잘 모르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재미가 있었다.이걸로 엄마가 맛나게 무쳐줄 것을 상상하니 좋았다.된장과 깨소금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별미였다.
  산 정상 가까운 곳은 지난 겨울에 산불이 나서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아주머니 한분이 "저기 가마  산나물이 억수로 많다 아이가"하며 앞장 섰다.그래서 동네사람들이 하나둘씩 그녀를 따라 올라갔다. 정말 그곳은 화재로 인한 재가 거름이 되어 각종 나물이 통통하게 살이 찐게 많이 있었다.나무 사이와 바위틈에 있는 산나물을 뜯는 것과 같은 수고로움은 없었다. 파란것은 다 나물이었다 너도 나도 부지런히 나물을 뜯는데 총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아뿔싸.... 빨간 깃대가 꽃혀 있었고 출입금지라 쓰여 있었다 .나물찾아 삼만리였던가 ? 총알은 빗발치듯이  나물 하는 동네주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쏘아 대었다. 나물이 뭐라고 죽음의 땅으로 왔단 말인가? 눈물이 났다.이길로 엄마와 가족들을 영영 이별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숨을 곳 하나 없는 곳이라 저마다 나물 보따리를 머리에 덮고 피신을 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 총알이 떨어지니 기가 막혔다 .어른들한테 들은 6.25동란 이야기가 현실로 다가 왔다.
  일행 중 갑티댁은 나이가 젊은 새댁이었다.
그는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큰 아이는 저능아이고 그 아래로 내리 6명의 아이를 두었다. 제일 작은 아이는 돌도 지나지 않은 젖먹이였다. 사라는 갑자기 그 갓난아이가 생각이 나서 갑티댁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갑티댁은 죽으면 안 되니더.쪼그만 아이들은 엄마 없음 안 되잖아요" 하며 나물이 들은 다래끼를 건네 주었다.마치 그게 방탄옷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한참동안  내리 퍼붓던 총알은 멈추었다
다행히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총알은 비켜 갔다.
" 우린 죽어도 보상은 커녕 벌금을 내야 될끼다"라며 가슴 졸이던 시간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더이상 나물을 뜯지 않았다. 혼비백산은 이럴때 쓰는 말일게다  한동안 귓가에 총소리가 나는 트라우마를 겪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죽음의 고비를 전쟁터에서 넘긴게 아니고 사격훈련장에서 겪은 동민들은 전우애를 느끼며 하산을 했다.
나물보따리를 저마다 이고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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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탄
#쌀한톨과목숨

   아침이 밝아 오면 잠도 덜 깬 몸으로 보리밥 한그릇을 배속으로 디밀어 넣고 등교를 한다.학교에서 커다란 가마솥에 강냉이 가루를 쪄서 간식을 주는 날은 가슴이 설렌다  .가마솥 앞에 일렬로 줄을 서 있으면 한동가리씩 나누어 주었는데 그 구수한 냄새가 오감을 자극한다
둥그런 채반위에 삼베보자기를 깔고 찌니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골고루 배식하기가 쉽지 않았다. 급식하는 아주머니는 몸집이 작은 사라에게 "많이 먹고 어서 크거라 "하는 말과 함께  큰 것을 집어 주셨다. 엄마를 줄 생각으로 강냉이빵은 보자기로 된 책가방 한 모퉁이에 고이 간직한다.먹고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학교 수업시간도 아직 많이 남았다 .생각은 온통 강냉이빵에 가 있었다. 드디어 학교를 마치고 허리춤에 책가방을 묶었다 .한쪽 끝에 매달린 옥수수빵은 아직도 온기가 남았다.조금만 떼어 먹어야지 하면서 맛을 보았다. 와우. 꿀맛 ....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먹었다.
길은 멀고 집이 가까워지자 거의 다 먹고 엄마를 줄 옥수수빵은 얼마 남지 않았다.
6.25전쟁 이후이니 그 간난함이 얼마나 컸으랴
군위댁은 일자무식이었지만 고사성어도 잘 쓰고 속담도 곧잘 사용하였다 .아이들이 "엄마 갱죽 먹기 싫어요.호박죽도 먹기 싫어요 " 하면 서러움 중에 제일 서러운게 배가 고픈 거란다 하면서 "아무리 대단한 양반이라도 3일을 굶기면 남의 담을 타 넘는다" 라고 했다  이거라도 먹는게 얼마나 큰 행복인줄 아느냐 하며 아이들을 달래곤 하였다.
   하루는 군위댁이 동화 아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가난한 집에 시아버지와 아들부부가 살았는데 양식이 똑 떨어졌단다.  못 먹어서 부황이 났어.얼굴이 누렇게 뜨고 붓기가 생겨서 죽게 생긴거야. 그래서 며느리는 온 집안을 뒤졌더니,찬장 속에 명태대가리 한개가 있더래 .며느리는 명태대가리에 항아리에 붙어 있던 쌀 한톨을 찾아서  그 쌀 한톨을 명태 눈에다 박아 넣고 푹 끓였지.그걸 시아버지와 남편 둘 중 한사람을 주어야 하는데 엄청 고민하다가 남편에게 먹였어 시아버지를 주면 남편이 죽어서 후사를 볼수가 없어서 윗대 조상들을 모실수가 없더래 그래서 남편을 먹여 살리고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 갔단다. 하면서 쌀 한톨의 중요함을 깨우쳐 주었다. 그런 교육 속에 자란. 아이들은 밥 한톨 버리는 일이 없었다
봄이 오면 냉이며 쑥이며 산나물이며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부지런히 해 와서 식구들을 배불리 먹여준 군위댁은 한줌도 안되는 허리에 손과 발만 커다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공룡의 손발처럼...

●#소설아닌소설쓰기
제15탄

#보릿고개 #넘어간다

맑은 햇살을 하늘에 뿌리며 떠오르는 여명과 함께 군위댁도 잰걸음을 옮긴다.  씨암소의 소죽도 끓여야 하고 ,시아버지밥상에 올릴 막걸리도 걸러야 하고, 어제 가져간 도시락을  내어 놓지 않은 아이들 도시락도 가져와 씻어 커다란 밥솥 위에 엎어 말려야 하니까....
정지에서 소죽간으로 소죽간에서 정지로 오가며 동분서주한 군위댁이 아이들을 깨우기 시작하면 아침햇살은  작은 동산에 고개를 내민다
    다시 아이들 깨우는 소리는 요란하고 ,큰 가마솥 여는 쇠소리와 함께 구수한 밥냄새는 진동을 한다. 도시락은 아이의 머리수대로  준비한다 반찬이라 해야 늘 뻔하다 .겨울이면 무짠지나 배추김치가 대세였고 ,여름이면 된장고추장을 섞은 것에 오이나 풋고추 그리고
짱아치류를 사 주었다. 어쩌다가 반찬에 멸치볶음을 사 주는 날엔  학교 가는 걸음이 경쾌하기만 하였다. 친구들한테 나도 맛있는 반찬 사왔다 하고 뽐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러나 점심시간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쉬는 시간에 조금씩 반찬을 꺼내 거의 다 먹어 버린 날도 있었다.
아랫동네에 대숙이는 약간 저능아였지만  도시락 반찬은 늘 고급지게 사 가지고 왔다 .쌀밥에 계란 그리고 멸치반찬 등 등...
그 집은 아이가 세명뿐이었고 부농이었는데 사라는 그 아이가 부러웠다 . 아이들은 바보라고 놀려 대었지만 말이다.
  군위댁은 찬거리를 마련하려고 밭에서 키운 마늘이며 콩.보리쌀 등을 머리에 이고 장에 가서 물물교환을 해 오곤 했다.주로 시아버지 밥상에 올린 생선이나 아이들 도시락 반찬꺼리들이었다.
장은 멀기도 하였다. 삼십리길을 갈때는 곡식을 이고 갔고 ,올때는 반찬꺼리를 바꾸어서 머리에 이고 왔다. 오가는 길은 재를 수도 없이 넘어 가야 하는 험한 길이었다.
장날이 일요일이 되는 날은 아이들이 함께 가겠다고 졸라대면 한명씩 데리고 가기도 했다
가는길은 멀어도 너무 멀었다. 한고개 넘으면 "엄마 언제 장에 가" 또 한고개 넘으면 "엄마 아직 멀었어"하며 엄마를 귀찮게 했다
그러다가 장에 도착하면 엄마가 가져간 곡식을
바꾸어 필요한 장을 보고 나서 맛난걸 사 주었다.
그 재미는잠깐이고 또 먼길을 걷고 또 걸어 산골짝 집으로 돌아오면 해는 서산에 기울어 간다
씨암소는 군위댁소리에 음매 하고 인사를 하였다
   겨울방학이면 뒤주의 나락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기 시작한다.군위댁은 아침은  밥으로 먹고 점심은 식은밥에 콩나물과 김치를 넣고 콩나물 갱죽을 끓여서 양식을 늘려 갔다. 아이들은 먹기 싫었지만 굶을 수가 없으니 먹었다.
방 한구석엔 늘 콩나물 시루가 있었고 그 시루는 검정천으로 덮어져 있었다 . 그 천이 위로 위로솟구쳐 올라오면 군위댁은 콩나물을 뽑아서 하루 한끼는 갱죽으로 식구들의 배를 채워주곤 했다.
그리고 군위댁은 양대콩을 넣고 호박죽을 자주 끓였다.  호박죽도 큰 가마솥에 가득 끓여 항아리에
퍼 놓고 동네 사람들도 먹이고 식구들도 먹였다
아이들은 정말 먹기 싫은  호박죽 과 콩나물갱죽이었다.

●#소설 아닌 #소설 쓰기
제14탄
#더 #넓은 #곳으로

선비양반의 둘째부인이 용재를 낳은 후 또 2명의 아들을 낳았다. 용재는 2살 많은 배다른 누나인 사라를 보리밭으로 패대기치며 선비양반을 자기 아버지라 우기던 아이였다
의성댁이 서당으로 이사온 후  두지붕 한가족은 겉으론 평온했지만 긴장감은 언제나 팽팽했다.
선비는 그 긴장감의 중간에 서서 줄타기를 하는 어름사니 같았다 하늘과 땅사이에 줄을 타는것과 마찬가지로 군위댁과 의성댁 사이를 오가며 삶을 지속해 갔다
소실을 들인 후에 본처인 군위댁도 딸 하나 아들 둘을 더 두게 되어 소실을 얻기 전 아들 하나에 딸 셋을 포함해 모두 7명의 자식을 두게 되었다
사랑방의 손님들이 오면 대화의 소재 중 가장 흔한 이야기가 슬하의 자녀의 수 였다. 이때는 자녀가 많으면 다복하다고 칭찬을 하였다.
선비양반은 아이들이 많다 보니 돈이 늘 필요했다
어느날 용단을 내렸다.
요즘은 정관수술이 흔한 의술이었고 보편화되었지만 쉽지 않은 수술을 단행했다
그도 10명 이상은 버겁게 느꼈던 모양이다
사라는 위로 세명 아래로 여섯명이 있었다 .형제자매에 치여 살았고 아버지의 엄한 교육에 억눌려 살았다
그리고 군위댁과 의성댁의 보이지 않는 묘한 긴장감을 피부로 느끼며 자랐다.사회적으로는 본댁이 상위였으나  다른 편으론 피해자였다
남편을 뺏긴 여자 아니 남편을 나누어 줘야만 하는 여자의 일생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란 사라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의 씨앗이 마음 저 밑바닥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러나 표현할 자유는 조금도 없었다 .아버지의 말이 곧 법이었고 군주였다.
아버지는 하늘이었고 감히 도전할 수 없는 높고 가파른 절벽이었다
거기다가 딸들은 존재가치가 없었다. 아들 아들 아들...
선비는 본댁에서 세명, 소실에서 세명의 아들을 두었다
위로 딸 둘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끝이었다
세째딸인 사라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중학교 입학을 허락한 선비였다
아마도 6학년 선생님의 통지표의 통신문이 선비를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고추는 작아도 사라는 작아도 공부를 잘 합니다" 라는 그 한줄의 글이 사라를 넓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제복을 맞추어 입게 되었다. 키도 작았지만 몸도 너무 작아 양장점의 주인은 고민을 많이 하며 크게 옷을 지어 주었다
앞으로 클 것을 생각해서 말이다
하얀칼라는 떼었다 붙였다 하는 것이었는데
그 칼라가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옷은 많이 컸고 치마허리는 핀으로 고정해야 했다
언니들이  학교를 갔으면 헌옷을 물려 받았을텐데
새옷을 입고 학교를 가니 좋아도 너무 좋았다
옷이 크건 말건 무조건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학교가 멀어도 너무 멀어 조그마한 사라에겐 나날이 등교하는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버스는 하루 딱 한대가 다녔다 .저녁 늦게 들어오는 버스가 윗동네에서 자고 등교할 시간에 아침버스가 운행 되었다. 버스는 늘 만원이어서 차장이 떠밀어 넣어주었다 . 손님을 짐짝처럼 밀어 넣고 차장이 "오라이"하면 출발했다
하교는 친구 두명과 걸어서 집으로 오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경숙이와 순이는 키가 반에서 아주 큰 편이었다.그래서 늘 내가방을 들어 주었다
신발가방 ,도시락가방, 체육이 든 날은 체육복가방,제일 무거운 건 책가방이었다.
도시락 반찬이 흘러 책과 옷을 적시는 일은 비일비재하였다. 몸이 허약한 사라는 그래도 학교 가는 것이 즐거웠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이  "얘야 젖을 더 먹고 오너라" 하고 빙빙 안고 돌려 주었다.그럴때마다 후리아 치마를 잡고 속옷이 보일까 노심초사했지만 사랑받는 느낌은 너무 좋았다.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가서 처음으로 기차를 보았다. 와우.! 저렇게 큰 차가 빨리도 달리네. 그리고 "꽤애액"소리도 잘도 질렀다

●#소설아닌 #소설쓰기
제 13탄

#땅강아지 의 행복

선비네 집은 초가삼칸과  사랑채가 있었고 사랑채 옆에 마굿간 그리고 디딜방앗간이 있었다
마당 남쪽에 떡 하니 자리잡은 나무뒤주는 별채의 집이었다. 선비양반네 뒤주는 농사에 비해 유난히 커서 가을 수확을 해서 모두 넣어도 겨우 3분 2를 채운다
사방이 나무 목재로 되어 있고 나락을 꺼내는 문은 12장으로 되어 있었다
맨 아랫나무로부터 1번이 시작 된다 .그 나무가 순번이 바뀌면 문을 닫기가 힘들기 때문에 양반선비는 묵을 갈아 한자로 一 二 三 을 써 두었다.
군위댁은 일자 무식이었지만 곧잘 그 순서대로 빼고 닫고를 하며 그 뒤주를 식구들의 생명줄로 알고 조석으로 살피었다
그  뒤주 안에 감을 따서 한켠에 놓아 두었다가 홍시가 되면 꺼내어 아이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시아버지 간식도 드리곤 했다
작은댁이 낳은 아이들도 물론 챙겨 먹였다
훗날 군위댁이 세상을 하직하자 그 아이중 한명이 "아이고 어매요 우린 이제 누구 믿고 사능교" 하며 목놓아 울었다
자기 엄마 즉 의성댁이 있는 옆에서 말이다
군위댁은 늘 말했다
"딸들은 키워 놓으면 다 남의 집 귀신이 되는데 그 아이들은 느그보다 낫다 "는게 군위댁의 지론이었다
집은 새미산 바람이 고을로 내려 오는 길목에 있어 유난히도 추웠다. 거기다가 옷이 시원찮아 더 추웠다
그 추위를 막으려고 양반선비는 오랜 세월 동안 담을 높이 쌓아 올렸다 .남이 하면 마음에 안 들어 직접 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깨알같이 써 내려간 한문처럼 담벼락은 높아져 갔다. 정지에서 불을 때면 굴뚝에서 바람이 들어와 연기는부엌에 가득 찼고, 군위댁의 목은 연기로 그을려 언제나 새까맣게 되었다
바람이 안 부는 날은 불은 그런대로 잘 타 들어 가고 방도 잘 데워졌다
봄이 오기는 아직도 멀었지만 뒤주의 나락은 줄어만 갔고 식구들은 많기도 하였다
도합 14명...
아이 열명에 군위댁 의성댁 선비양반  시아버지
막걸리 좋아하는 시아버지 술 빚는 용도로 쌀은 많이 들어 갔다
군위댁은 가마솥 위에 채반을 놓고 삼베보자기를
올려 술밥을 쪘다 .그것도 아이들이 없을 때 주로 작업을 했다.
어느날 배가 아파 학교에서 조퇴를 하고 집에 오니 구수한 밥냄새가 나서 보니 엄마가 술밥을
쪄서 항아리뚜껑에 푸고 있었다
정지문에 기대어 엄마를 바라보니 그릇에다 제법 한주걱을 푹 떠서 주었다
그 맛이 얼마나 좋았는지 폭풍흡입을 하고 행복해 하였다
언제나 뒤주의 나락은 쌀로 변해서 할아버지 술 담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밥에 들어 있는 쌀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몫이었고 그 다음 아들이었다
딸들은 보리밥 잡곡뿐이었으니 쌀밥한번 양껏 먹어 보는게 소원이었다.
늘 장이 좋지 않아 잦은 설사를 한 사라는 키가 자라질 않았다 .땅꼬마 혹은 땅강아지로도 불렸다
군위댁은 고두밥에 누룩을 비벼 항아리에 넣어 뚜껑을 덮고 아랫목에 갈무리를 하고 나서 ,작은 닭 한마리를 잡아 뜨거운 물에 털을 뽑고 있었다
부엌에는 술밥을 찌고 남은 장작불이 남아 있었다
닭 손질을 마친 군위댁이 옹기 투가리에 닭과 마늘을 넣더니 아궁이 숯불에 올렸다
얼마 있지 않아 닭 익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군위댁이 소리를 내어 사라를 불렀다. 정지로 갔더니 군위댁이 뒷방 즉 골방이 있었는데 그리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오면 먹을게 없으니 너 혼자 먹으라는 것이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골방에 들어가 작은 닭 한마리를 통째 다 먹는 행운을 누렸으니 사라는 행복한 마음이 하늘에 닿은 듯 했다
뒤주의 나락이 점점 줄어 가고 아직 봄은 오지 않았는데 귀한 대접을 받은 사라는  엄마도 함께 먹자는 말도 없이 혼자 다 먹어 치웠다

●#소설아닌 #소설쓰기
제 12탄
#개울물은 흘러 #강으로 가고

산골에 태어나 성장한다는 것은 자연이 전부였다
보이는 것은 산과 하늘이요, 그 속에 살아가는 온갖 생명들이 친구였다.
어쩌다 아랫마을에 가설극장이 들어 오는 날이면 온동네 아이들의 축제였지만  선비양반네 네자매는 바깥출입이 철저히 통제 되었다. 그의 지론은 이때에도 적용 되었다 "여자와 바가지는 돌리면 새거나 깨진다" 는 것이다.마음은 가설극장에 가 있지만 갈 수  없는 딸들이었다. 그 중 둘째딸 숙이는 유난히 별난 행동을 하곤 했다.아버지를 피해 길이 아닌 논두렁 밭두렁을 통해서 극장에 갔다 오곤 했다
이런 날이면 선비양반은 동네를 순회한다. 손에는 언제나 조그만 후레쉬 하나가 들려 있었고
사람소리가 나면 즉시 비추어 신원을 확인하였다
마치 자신이 경비대원인양...
길이 아니면 못 가랴, 선비의 둘째 딸 숙이는 그래도 도망쳐서 보고 오는 악동이었다
동네 한바퀴 경비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
그는 딸들이 자는 방으로 들어와 후레쉬를 비추어 딸들의 머리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일상은 늘 똑 같았다  그걸 잘아는 숙이는 이불 속에 사람이 있는것처럼 다른 이불을 속에 넣어 두고 머리모양도 만들어 이불을 덮어 놓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카트를 유행시킬때 그걸 입고 싶어 하던 숙이는 아버지 몰래 도시에 나가 빨간 원피스를 맞추어 입고 노래자랑에 나가기도 했다
   어느날 선비양반이 커다란 물건을 사 들고 집으로 들어 왔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사 온 물건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커다란 박스에서 나온 물건은 네모난 모양으로 금색테두리에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그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뛰어 나오는 것이었다
" 와아. 와아 이건 뭐야 .? 이 속에 어떻게 사람이 들어가서 말을 하노" 아이들은 폴짝폴짝 뛰며 신기해 하였다.
금성라디오는 제일 먼저 선비네 집에 들어와 문명의 맛을 선물해 주었다 .이 라디오는선비의 자녀
열명에 의해 순식간에 온동네에 소문이 났다.
동네 사람들은 아이 어른 할것 없이 모여 들었다  한바탕 새로운 문명의 소용돌이가 치고 난 뒤  선비양반의 자녀들은 어깨가 으쓱했다
그 후 라디오로 대한 뉴스도 듣고 노래도 흘러 나오니 신기방기한 일이었다.
아무리 막아서도 세월은 가고,  작은 개울물도 흘러 흘러 강으로 가게 마련이다.그 강물도 언젠가 바다로 가듯  그렇게 시간은 가고 있었다

●#소설아닌 #소설쓰기

제 11탄
#또 #다른 #세상을 #향하다

올망졸망 왁자지껄 선비네 아이들은 10명이었다
군위댁은 3남4녀였고 첩실인 의성댁은 3남이었다
사랑채에 손님이 오면 단골 대화는 늘 "슬하에 자녀는 몇명을 두었는지요..? " 10남매를 두었습니다" 하고 자랑스럽게 말을 하는 선비양반이었다.
하긴 형제라곤 누나 한사람뿐이었으니 혈육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종일 곰방대에 담배를 밀어 넣고 불을 붙이던 할아버지는 군위댁이 하루 세끼 차려준 밥상에 막걸리 한사발을 마시는게 매일의 일상이었다 . 그 밥상은 아이들이 보기엔 너무 특별한 밥상이었다.김도 있고 계란찜도 있고 생선도 간혹 올라 왔다 .꾀많은 형제자매들은 빨리 밥을 먹고 건넌방으로 몰래 건너가 할아버지 밥상머리에 앉아 빤히 쳐다 보았다
그런 날은 할아버지가 밥과 반찬을 남겨 주었다
하얀 쌀밥은 부드러웠고 김조각은 혀를 황홀하게 하였다
멀리서 봄이 오고 있었다
76세라는 세월 앞에 할아버지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과 이별을 했는데 그날이 사라가 중학교 입학을 하는 날이었다
언니가 둘이 있었으나 선비는 진학을 시키지 않았다  여자는 많이 배우면 못 쓴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고, 아이들이 많아 보낼 형편도 되지 않았다
통지표에 적어준 통신문이 선비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중학교 입학을 허락해 주었다
뛸듯이 기뻤다
그런데 입학하는 날 하필이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사라는 갈등을 하다가 삼십리길도 넘는 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
학교는 분교였고 전교생은 180명이었다
여학생은 한학년에 14명이 정원이었다 .입학은 시험을 봐서 들어가는 거였다 .
전 고을에 여학생 14명 속에 속했고 키는 제일 작았다.  검정색 교복에 하얀 칼라를 떼고 붙일 수 있는 웃옷과 치마는 후리아 치마 였다.
할아버지의 죽음도 뒤로 하고 교복을 입고 몰래 학교를 가다니...
한편으론 죄스러웠으나 발걸음도 가벼웠다.
작은 키에 아장아장 걸어가는 그 길은 또 다른 세상을 향하고 있었다.

●#소설아닌 #소설쓰기

제 10탄
#고추는 작아도 #맵다듯이


꼭두새벽 동이 트기전 선비는 본가로 돌아왔다
두지붕 한살림을 하는  선비의 일상이었다. 새벽에 갔다가 꼭두새벽에 환지본처...
그는 마치 전쟁을  앞둔 장수처럼 심기를 가다듬고  핫바지 속의 주머니 사정을 헤아린다
남편을 뺏기고 홀로 밤을 지샌 군위댁도 일상은 그대로 시작이 된다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암소한마리를 거두며
자식 7명을 건사해야 하니 늘 바쁜 일상이다
일어나자마자 정지문을 삐끄덕 열고 가마솥에 물을 덥힌 후 그 물로 시아버지 밥상에 올릴 막걸리를 거른다 .그리곤 그 솥에 밥을 안친다.
잡곡이 주로 들어가고 쌀은 아주 조금 한가운데 들어가게 해서 뚜껑을 닫고 불을 땐다. 혹시나 쌀이 흩어질까 조심조심...
시아버지는 큰 키에 기다란 얼굴이었고 머리는 바리깡으로 밀었다. 스님머리칼보다 약간 길게 말이다
양반선비가 하는 유일한 효도가 머리를 깎아 주는 일이었다
그것 말고 더 큰 효도는 자손이 귀한 집안에 자식을 많이 낳아준 것이었다
종일 곰방대에 풍년초 담배를 밀어 넣어 피우다가 심심하면 뒷동산에 묻힌 아내의 무덤을 찾아가 산소를 돌보는 일이 전부였다
젊을때 어디를 다쳤는지 늘 바지에 피가 묻어 나오니까 헝겊을 덧대어 꿰매 입히는 것도 군위댁의 일상이었다
엄동설한에도 그의 막걸리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밥상에  막걸리를 반주로 드시는 시아버지덕에 군위댁은 밀주를 담구어야 했고
순사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밀주 항아리를 숨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시아버지밥상 따로, 남편밥상 따로 , 아이들 도시락 소여물 끓이기 등으로 군위댁은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었다
학교갈 시간이 되면 작은댁이 낳은 아이들이 본댁으로 오고 저마다 눈치를 보며 몸을 비비꼬고 있다가 용감한 아이가 운을 뗀다
"아부지요 공책없심더"
"아부지요 연필없심더" 하면 선비는 바지 속 주머니를 꺼내 한푼씩 주면서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목적을 이룬 형제들이 떠나면 군위댁의 막내아들이 등교거부를 한다
그도 그럴것이 작은댁인 의성댁의 둘째가 동갑으로 6개월 먼저 태어났다
"느그는 쌍디도 아닌데 이상하네" 하며  놀려 대었다
늘 같은 학교 같은반이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아버지가 같아도 어머니가  다르니 얼굴이 많이 달랐다
의성댁의 둘째 아들은 마음이 참 선량했고 , 군위댁의 막내아들은 좀 앙칼졌다
언제나 그 형을 무시했다 "야 ! 첩사이 새끼야"
하며 달려 들었다
처첩간 싸움은 못하는데 자식들간 싸움은 자주 일어났다. 언제나 양보는 의성댁 소실의 둘째였다
그 아이는 지은 죄도 없이 늘 주눅이 들어 있었고 한글을 깨우치지 못했다.
  사라는 이런 저런 환경에서도 학교는 최고의 놀이터이자 출구였다
2학년때 담임선생님이 글을 쓰시는 분이었고
글짓기 지도를 열심히 해 주었다
그때 한글을 못 깨우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사라는 한글을 완전히 깨우치고 글짓기도 곧잘 했다
6학년때 담임은 소아마비 중증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었고 학교 사택에서 지냈다
그 아이는 네발로 기어다니는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은 난폭하고 매서웠다.
안 맞아본 아이는 없었다.
종아리를 맞으면 피가 맺히도록 때렸고 ,심하면 뺨도 거침없이 때렸다.
무사히 6학년을 마치고 통지표를 받았다
수 수 수 우 우 우 미
통신문에는 "고추는 작아도 맵다듯이 사라는 작아도 공부는 잘 합니다"라고 써 주었다

●#소설아닌 #소설쓰기

제9탄
近墨者黑 이요

가을 추수가 끝이 난 산골마을은 겨울 동안 별일이 없었다
양반선비는 군위댁에게만 별로였지 고을에서는 점잔하고  한학에 능통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문맹인이 많았던지라 대필도 하였고
결혼할때 주고 받는 사성지(신랑이 태어난 년 월 일 시를 적어 신부측에 보내는 편지)를 써 주기도 했다
결혼시즌이 되면 선물보따리를 들고 양반선비에게 글을 써달라고 찾아 왔다
선물이라 해야 소박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입춘이 되면 入春大吉 建陽多慶을  써서 대문에다 붙이는 일은 연례행사였다

이 날이 되면 동네 어른들이 와서 자기도 써 달라 하면 기꺼이 써 주었다
이 날은 의관을 정비하고 지필묵을 갖다 놓고 글을 쓰는데 매우 경건한 의식을 치루는 것 같았다
선비는 붓글씨를 쓸 때 묵을 가는 일은 아이들을 불렀다
한번 불려 가면 먹이 새까맣게 잘 갈릴때까지 계속 갈아야 하니 팔이 많이 아팠다
꾀많은 아이는 "아부지 아부지 화장실" 하며 도망을 치기도 했다
그러면 또 다른 아이를 불렀다
아이가 많았으니 천만 다행이었다
거기다가 후학들을 양성하는 서당을 만들어 한문을 가르쳤다
학습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글 읽는 소리는 다 달랐고 무릎을 꿇고 글을 소리내어 읽는 모습이 엄숙하기 그지 없었다
어린 사라는 서당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마치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사자소학 명심보감 천자문 등을 떼고 나면 사서를  읽었다
먼저 소리내어 읽는 것을 연습하고 나면 그 다음은 써 보게 한 것이다
선비는 한지에 세필로 줄을 긋고 거기다가 깨알같은 작은 글씨로 사서 삼경을 베끼기도 하였다
그리곤 그것을 책으로 묶어 놓곤 하였다
집은 언제나 양반선비의 담배연기와 묵향이 혼합되어 이상야릇한 냄새를 풍기었다
"서당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게 맞는 속담이었다
군위댁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近墨者黑 이었다
먹을 가까이 하는자는 검어진다는 뜻으로 나쁜사람과 가까이 하면 나쁜 버릇에 물들기 쉽다는 뜻이다
친구를 가려서 사귀라고 누누히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苦盡甘來 였다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힘들어요"  하면 고진감래라 하고 설득을 했다
힘든 것을  해 내면 반드시 달콤한 내일이 있다고 했다
한 해 농사가 끝나고 농한기가 오면 온동네 아니 그 고을의 젊은이들이 하나 둘씩 서당으로 모여 들면 개별로 교재를 주고 학습을 했다
요즘 말로 하면 개인지도 였다
그도 그럴것이 입학날짜가 따로 없었다.각자 형편에 맞게 와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먼산 아지랑이가 일어나고 봄기운이 저 멀리서 오면 서당에 모인 학생은 또 하나 둘씩 떠나게 되었다
그 중에 여러해 서당에 나온 사람은 갓 입문한 학생을 가르치게도 하였으니 제법 서당이 잘 굴러간듯 하였다
모두가 가난하게 살았기에 학비는 따로 받지 않았지만 형편에 맞게 보리쌀도 갖다 주고
쌀도 갖다 주고 반찬거리도 갖다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겨울에 서당에서 글을 읽으려면 구들장을 덥힐 땔감이 필요했다
서당의 학동들은 겨우내 쓸 나무를 공동으로 해 와서 겨울을 나면서 한학을 익혔다
그때에는 소 등위에 질매를 씌워서 나무를 그 위에 얹고 서당으로 오곤 했다
가지런히 땔감을 칡넝쿨로 묶어서 소의 양쪽 질매에 얹고 서당으로 소 여러마리가 들어와 나무를 내리면 겨울을 너끈히 보낼 수 있었다
그 나뭇단 위에 꽂힌 진달래 꽃봉오리는 나비가
앉은 듯 봄을 재촉했다

●#소설 아닌 #소설 쓰기

제 8탄
#잘려  #나간  #손가락 한마디

학교에서 돌아 오면 소를 먹이러 산에 오르는 일은 매우 중요 했다
사라는 원하든 안하든 목동이었다
군위댁은 암소를 자식처럼 사랑했다
누렁이 암소는 농사를 짓는 중요한 농부였고 해마다 송아지 한마리를 낳아주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이 송아지를 팔아 처첩이 낳은 자식들의 학비를 대는 암소였으니까...
물론 송아지 판 대금은 선비양반 주머니에 들어가  권력을 행사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그리고 농사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사래 긴 밭의 잡초를 매고 와서는 식구들의 밥과 소죽을 동시에 끓이는  일을 날마다 하였다
밭에서 키운 야채는 집안의 중요한 먹거리였다
커다란 가마솥 안에 호박잎이며 깻잎을 찌고
때로는 채반에다 장떡도 만들어 식구들 기근을 면하게 해 주었다

어느 날 선비양반이 지게를 매고 풀을 베러 가서는 칡을 거두어 갖고 왔다
이건 정말 천지가 개벽하는 일만큼 드문 일이었다
선비양반은 짝두를 밟고 군위댁은 칡을 짝두에다 대어 주는데 비명소리가 들렸다
군위댁의 오른쪽 엄지 손가락 끝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칡넝쿨이 걸리적 거리면서 손가락이 짝두에 딸려 들어간 것이었다
피가 위로 펑펑 쏟구치고 있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비명을 냅다 질렀다
급히 방으로 들어가 아까징기를 바르고  헌 메리야스를 찢어 지혈을 시켰다
본처인 군위댁은
얼굴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수줍음이 많은 소녀같았다
눈매는 약간 겁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1미터 55센티 키에 허리는 25도 되지 않은 가냘픈 체형이었다
입이 짧아 아무거나 잘 먹지를 못하는데다 하루종일 노동을 해야 하니 살이 찔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31세에 씨앗을 보았으니 먹는게 영양이나 되었겠는가 말이다
근데 그녀의 몸 중에 가장 발달한 곳이 있었으니 손과 발이었다
손은 마디가 아주 굵었고 쩍 벌어져 있었다
그 손으로 등을 긁어 주면 가시로 긁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발 또한 넙적하고 튼튼해 보였다
오직 손과 발로 노동하기에 알맞게 변해 있었다
한여름에는 길쌈도 열심히 했다
오른쪽 다리를 걷어 올리고 삼베실을 이어 나갔다
소쿠리 한가득 실이 쌓이면 다른곳에 옮겨 두고 또 실을 이어 가느라 다리의 가는털은 다 뽑혀 나가고 없었다
밤이 되어 빛이 없는 그 시간을 빼고는 노동이 그녀의 삶이었다

●#소설 #아닌 #소설쓰기
제 7탄
#소치는 #목동

선비양반의 집에서 제일 큰 자산이 논과 밭이고.그 다음 자산은 잘 생긴 암소 한마리였다
아이가 10명이나 되지만 소먹이러 산에 가는 당번은  언제나 사라의 몫이었다
작은댁 아이들은  본댁에 와서 놀고 밥도 먹었지만 소 먹이러 산에 가는 일은 하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되면 10가구가 살던 동네엔  집집마다 아이들이 최소한 7명은 되었으니   언제나 시끌벅적 했다
학교에서 돌아 오면  군위댁이 차려준 밥을 먹고 동네에서 제일 높은 새미산에 가서 소에게 풀을 뜯기고 오는 것이었다.
밥이라 해봐야  보리밥과 생된장에 오이와 고추를 찍어 먹었고 겨울 짠지 (김장김치)가 전부였다
아이들이  집에 오면 군위댁은 아이들이 오는대로  소에게 신선한 풀을 먹이러 가라고 하였다.
첫째도
둘째도
세째도 다 이유를 대고 소를 먹이러 가지 않았다
네째인 사라는 그 모습을 보고 더 이상 거절하는건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

"어무이. 내가 다녀 올께요" 하면  엄마 군위댁은 너무 좋아하였다. 그리곤
"쪼매 기달려"
하고 부엌으로 들어가 광목 베보자기에 보리개떡을 싸서 손에 들려 주었다
출발할때는 마지못해 갔지만 새미산 까지 가면 엄청 좋았다
동네 아이들은 최소한 여남은 명은 되었다
소는 소대로 풀을 뜯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신나게 놀다가 해그늘이 지면 소를 찾아 내려 오면 그만이었다
그 주변에는 밭도 없고 곳곳에 칡넝쿨을 비롯하여 엄청 좋은 풀들이 가득하였다

아이들이 주로 노는 곳은 산등성이에 7개의 무덤이 나란히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일렬종대로 7개의 무덤은 윗대 조상부터 차례로 모셔져 있는 문중 선산이었다
맨  윗무덤에서 맨 아랫무덤까지 달려서 돌아오기도 하고 무덤봉분 위에서 공기돌 놀이도 하였다
아이들이 얼마나 무덤위에서 놀았는지 무덤 7기는 평평하게 되었고 아이들은 마당묘라 불렀다
(마당처럼 평평하다고 붙인 이름)
사라는
해그늘이 져서 소를 찾아 집으로 오려고  암소를 찾아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울면서 하산하였다
집에 와서 소를 잃어 버렸다고 하니
선비 양반과 군위댁은 야단칠 새도 없이 후레쉬를 들고 산을 올랐다
동네 장정들과 서당 문하생들이 함께 암소를 찾아 떠났다
사라는 너무 겁이 나서 덜덜 떨고만 있을 뿐...
밤은 깊어 갔고
소를 찾으러 간 사람들도 돌아 오지 않으니 정말 두려웠다
군위댁과 선비양반에게는 가장 큰 자산이 암소이다
해마다 호박과 콩깍지 등을 삶아 먹여 애지중지 기른 보답으로 해마다 송아지 한마리를 낳아 주었던 암소이다
그리고 논밭을 우직하게 갈아 주는 일꾼 중 최고의 일꾼이 아닌가
소를 찾아 오든  못 찾아 오든  야단은 맞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밤이 깊어 몇시간이 지나  암소 우는 소리와 사람들 수근 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새미산 정상을 넘어간 암소는 주인이 부르는 소리에 음매하고 화답을 했다
가서 보니 무덤가에 있더라는 것이다
암소를 찾아 앞세우고 함께 간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 오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너무 반가웠다
선비양반과 군위댁은  다행히  야단을 치지 않았다
그 전에는
우리 소가 남의 집 콩밭에 들어가 콩을 엄첨 뜯어 먹어 버려서 야단을 맞기도 했다
돌보라는 소는 보지 않고 실컷 놀다가 오는
사라는 사고뭉치 목동이었다

●#소설아닌 #소설쓰기
제 6탄
#하늘같은 #아들얼굴에 #상처가 나다

바햐흐로 날씨는 살을 에는듯한 겨울이었다
옷이 따뜻하지 않아 더 추웠다
사라네 형제자매들은 좁은 방구석에 앉아 놀 수는 없어서 개울가로 가서 얼음을 지치고 놀았다
양반선비는 게을러서 또는 체면에 일을 안했지만 꼼꼼한 구석이 있었다
직사각형의 나무네모판에다 아랫쪽에 짧은 다리를 달고 다리 아래에 굵은 철을 휘어 붙여 주었다
그리고 동그랗게 나무 두개를 깎고 그 가운데 제법 큰 철을 박았다
한쪽은 뾰족하게 하고 한쪽은 숯불에 달구어서 나무속에 집어 넣었다
그때 나무 타는 냄새는 신기하고 양반선비가 대단해 보였다
그 판위에 사람이 앉고 얼음을 지칠때 양손에 잡고 나아가게 했다
그것도 언제나 남자애들 몫이었고 그들이 내어줄 때만 여자애들도 타 볼 수 있었다
여자애들은 그냥 얼음을 발로 밀고 다녔다
온몸에 바람이 들어 와도 마냥 즐거웠다
손이 시렵고 발이 시렸다
낡은 고무신 아래 얼음은 차갑다 못해 쩍쩍 달라 붙었다
그러다가 얼음구멍에 발이 빠지는 날은 발이 동태가 되어 집으로 오곤 했다
겨울은 개울가가 최고의 놀이터였다
얕은 얼음 아래에서 노는 송사리들도 구경거리였다
그야말로 수족관 그 자체였지
그해 겨울도 어느덧 익어갈 무렵 대군들이 개울가에서 각자 방식으로 얼음판을 즐기고 있는데
비명소리가 들렸다
군위댁 (본처)의 둘째 아들 용이가 넘어져 턱 밑이 찢어졌고 얼음판위에는 핏물이 낭자했다
엄청 귀한 대접을 받은 동생이라 사라는 말할 수 없는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군위댁이 첫번째 아들을 낳고 연이어 딸 넷을 낳은 후 아들이라 대접이 남 달랐다
그것도 본처의 아들이지 않는가?
동생이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몇바늘을 꽤매는 대형참사가 벌어진 것이었다

사라는 도저히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가면 크게 혼날 것이 뻔하지 않은가
동생을 안전하게 데리고 놀지 못한 죄가 덮어 씌워질 것이 뻔하니까...
종일 밖에서 놀았고
거기다가 얼음위에서 놀았으니 뼈속 까지 추웠다
그런다고
어디 마땅히 갈데가 없지 않은가
궁리끝에 한 생각이 났다
바로집 담벼락 옆에 계단식 논이 있어
구석에다 지푸라기와 낙엽을 긁어 모았다
바람도 막아주고 집이 가까우니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산그늘은 짙게 내려 앉았고 뒷산 부엉이는 그날따라 더 요란히 울어 대었다
양반선비는 늘 저녁이면 딸들의 머리 숫자를 세는 버릇이 있었다
"여자하고 바가지는 돌리면 깨진다" 고 하면서 누워자는 딸들의 머리숫자를 세고는 담벼락과 직선거리 150여미터에 있는 서당이자 작은댁으로 갔다
세째가 없다
어디로 갔을까?
후레쉬를 챙겨 들고 이름을 부르며 찾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계단식 논 구석에서 밤을 세울 생각에 춥기도 하려니와 무서운 생각에 울음조차 낼 수 없었던 사라는 부모들과 언니 오빠가 찾는 소리에 그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엉 엉엉 훌쩍 훌쩍.."
처음은 안도감에 눈물이 났지만 그 다음은 나를 데리고 가 달라고 더 서럽게 울었다
그래도 가족들은 찾지를 못하고 불러대기만 했다
양반선비가 외쳤다
"나오너라 어디있냐 야단치지 않을테니 어서 나와"
하는 소리에 흐느껴 울면서 일어났다
몸에는 지푸라기와 낙엽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무섭고 두려워서 울고 또 울은 눈이 퉁퉁 부어 있멌다
정말 야단을 치지 않았다
배는 꼬로록 소리를 내었다
밥을 달라 소리는 차마 못했다
근데 군위댁이 동치미국물과 된장찌개를 부엌아궁이에 데워다 갖다 주었다

"아 !정말 집은 좋아
그리고 엄만 최고야"
깊은 안도의 숨을 쉬며 곤한 잠에 빠져 들었다

●#소설아닌 #소설쓰기

제5탄
#호박이 #넝쿨째


배다른 형제자매 10명이 살아가는 사라네 집은 언제나 시끌벅쩍이다
작은댁의 아이들은 학교를 갔다 오면 당연한 듯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왔다
본댁인 군위댁이 3남4녀이고 둘째부인 의성댁이 3형제를 두었다
오빠와 언니도 대가족 안에서 위상이 대단했다
줄을 서라면 서야 했고
엎드려 뻗치라면 뻗쳐야 했다
사라는 소화기관이 약해 먹고 소화를 시키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몸은 너무 연약해서 늘 군위댁은 바람이 불면 날아간다고 나가지 말라 주의를 주었다

"저거는 손목이 삐가리 다리 만해"

그런 말을 자주 들으며 자랐다 형제들이 열명이나 되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성장했다
먹는것도 부실했고 입는 것도 형편이 없었다
그저 안 굶는 것 만으로 감사해야 했다

군위댁은 시아버님 봉양과 선비양반 남편과 팔자에 없는 작은댁 아이까지 보살펴야 하는
삶이었다
그녀는
난봉군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 먹는 것을 한번 배불리 먹지 못한채 19살에 양반선비한테 시집을 오게 되었다
실컷 돌아 다니다가 가끔씩 와서 동생들을 만들어 놓고 또 집을 나가니 어머니가 남의 일을 해서 아이 넷을 키우고 있었다
디딜방아를 찧어 주고 그 댓가로  보리쌀 한바가지를 얻어 오면 맏딸인 군위댁이 큰 가마솥 부뚜막에 올라가 죽을 끓여 동생들을 먹이고 보살피고 했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 7살에 말이다
기가 센 여동생이 울며불며 늘 하는 말이 있단다
"죽  도 . 죽 도 .죽 도"
밥을 자주 먹지 않고 죽으로 연명하다 보니 어린 동생이 배가 고파 울며 하던 말이 "죽 도"
라는 말이었다
그런  군위댁이 양반 선비집으로 시집을 오니 뒤주에 나락이 있고  항아리에 하얀 쌀도 있으니 경이로왔다
효심이 가득한 군위댁은 배를 곯고 있을  친정 엄마와 동생들 생각에 밥이 넘어 가지 않았다
신천지를 느낀 군위댁의 행복은 지극히 짧았다
아들 하나 딸 셋을 낳고 나서 선비양반이 새로운 부인을 맞이했다
겨우 7년을 살고 나서 새로운 부인을 맞이하게 되니
그녀의 나이 고작 26세였다

"군위댁은 일자무식이었다. 그러나 선비양반을 남편으로 둔 덕에 유식한 이야기를 곧잘 사용했다
아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했다
"근묵자흑" 이요 하면서 친구를 가려 사귀어야 한다고 훈계를 하였다
아이들은 엄마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자라서 철이난 후에 알았다
배고픔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종달새가 하늘 높이 날며 지저귀는 봄이 오면 오강에 오줌을 양철통에 담아 이고서 십리길이나 되는 사래긴 밭둑에  구덩이를 파고 그안에 부었다
그리고 퇴비도 포대에 넣고 이고 가져가
넣었다
강가에 살얼음이 녹고 땅도 녹으면 호박을 심었다
밭둑은 호박넝쿨로 가득했다
가을이 오고 서리가 올 즈음에 호박은 따서 집으로 가져 와야만 하는데  그많은 호박을 어찌 연약한 군위댁이 다 가져 오냐는 것이다
군위댁은 사라만큼이나 호리호리하고 연약했다
허리가 한주먹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튼실한곳은 오직 두손과 두발이었다
손마디가 굵직하여 누가 보아도 손을 얼마나 놀렸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틈틈히 머리에 이고 멧돌호박을 이고 옮겼다
그런데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니 군위댁은 발을 동동 굴렀다
조심스레 양반선비에게
지게에 바소쿠리를 올리고  호박을 가져 와 달라고 부탁했다
마치 죄인이 된 양 굽신 거리며
"여보 날씨가 추우면 호박이 얼어 버림 안되니 도와 주시요" 하니 마지 못해 승락을 하였다
선비양반이 지게를 지고 사래긴밭으로 가서 호박을 실어 왔다
지게를 진 폼을 보면 지게가 몸에서 제껴지고
있어 보는 내내 군위댁은 조마조마 했다
그래도 여인보다는 남정네가 한번 다녀 오는게 훨씬 생산적이었다
그렇게 몇번을 가져와 집에 가져 오니 집안 곳곳에 호박이 굴러 다니듯 했다
그 호박 하나하나에 군위댁의 한숨과 회한과 노고가 담겨 있었다
군위댁은 덜 익은 호박은 소죽솥에 소여물과함께 넣어 소에게 먹이었다
겨울철 이웃소들은 털이 까칠했으나 이 집 암소는 윤기가 났다
그리고 봄이  다가오는 2월말쯤 송아지 한마리를 낳았다
이 송아지를 얼마나 정성껏 키웠는지 우시장에 가면 최고의 값을 받고 팔았다
이 송아지를 몰고 우시장에 갈 때도 선비양반의 복장은 하얀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 갔다
이 송아지는 양반선비의 가장 큰 수입이었고 이 돈으로 아이들 학비를 대었다
키우기는 군위댁이 키우고 권력은 양반선비의 몫이었다

잘 익은 호박은 군위댁이 양대콩과 호박을 함께 푹 삶아서 호박죽을 끓였다
큰 옹기항아리 뚜껑에 퍼서 장독대에 올려 두고 아이들에게 먹였다
그리고 저녁에 놀러오는 이웃들에게도
살얼음이 살짝 낀 호박범벅은 그야말로 최고의 영양식이었다

●#소설아닌 #소설쓰기
제 4탄
선비의  복 주머니

용재네가 서당 옆 빈방으로 이사를 오고
두지붕 한가족이 어울렁더울렁
살아가는데  세월이 지나가니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본부인한테서 사라의 동생이 태어났다
외동아들인 아버지한테서 4번째 딸이었으니 그닥 환영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녀는 복이 많았다
이름을 복순이라 지어서 그랬나
첫째는 늘 새옷을 사야만 했고
둘째는 언니의 옷을 물려 받아 좀 낡은 옷을 물려 받았다
세째인 사라는 팔꿈치며 손목이며 헤진 옷을 덧대어 꽤매 입혔다
그러나
네째딸은 더이상 입힐 수가 없어서 새 옷을 얻어 입었으니 복이 많은 복순이었다
세째딸은 선도 안보고 데려 간다는데 사라는 새옷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언제 나도 새옷 한번 입어 보았으면 소원이 없었다
그러던 날  수학여행을 가는 시즌이 왔다
경주여행이 잡혀 있는데
엄니 왈 여행을 안 가면 새 옷을 사 주시겠다고 꼬득였다
여행도 가고 싶고 새옷도 갖고 싶은 사라는 번뇌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
"새 옷을 한번 입어 보자" 하고 학교에 여행을 가지 못한다고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나니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때 얻어 입은 옷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화가라면 그대로 그릴 수도 있을 만큼...
웃도리는 파랑색 스텐칼라에 가슴양쪽에 꽃이 수놓아진 쉐타였다
재질은 개옷(모가 들어간 )이었다.
아랫도리는 기지치마인데  맞주름을 잡았고 색깔은 진곤색이었다
숯불을 올린 다리미로 줄을 세워준 그 옷은 사라가 얻어 입은 처음이자 마지막 옷이었다
비록 수학여행은 가지 못했지만 발걸음도 가볍게 돌아 다녔다
누가 봐주고 이쁘다고 해주면 좋으련만 그닥 보아주는 이는 없었다
그럭저럭 시간은 흘러  복순이는 남동생을 얻었다
선비 아버지는 입이 벙글어졌고 본댁도 기가 살았다
아들 아들 아들이 무엇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웃동네 영숙이네는 딸을 8명을 내리 낳았다.
아저씨는 대를 잇는다고 또 아이를 낳았는데 9번째 드디어 아들이 태어나서 동네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작은댁도 아들을 낳았고 본댁도 또 아들을 낳았고
작은댁도 세째를 낳게 되니 도합 열명의 자식을 거느리게 된 선비였다

사랑채에 손님은 어느날 빼꼼한 날이 없었고 여느때 처럼 술상은 들고 나고 했다
"슬하에 자녀는 몇이나 두셨습니까"
"아 .예 십남매입니다"
이 소리는 단골 대화였다
그 소리는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사랑채의 대화였다
선비는 매우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작은댁으로 건너가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는 틀림없이 본가로 돌아온 선비는 단정하게 앉아서 글을 읽었다
여지없는 양반선비의 모습이다
부산하게 아침밥을 먹고 아이들이 학교를 갈 시간이 되면 방문앞에 줄을 서서 학비며 용돈을  타 가려고 진을 친다

가장 용기 있는 자가 먼저 운을 뗀다.
"아부지요 공책 사야 하니더"
선비의 바지 안에 숨겨진 주머니가 끈이 풀리면 한푼 타서 한사람이 가면 다음 순번이
"아부지요 연필 사야 돼요"
"아부지요 책 사야 돼요."열명 모두 다른 항목으로 요구를 한다
선비는 서넛 까지는 그런대로 돈을 주고 그 다음부턴 한숨을 내리 쉰다
갈수록 돈이 마르고 선비의 얼굴 또한 일그러진다
그렇게 주머니가 털리고나면 선비의 입에선 "아이구 훈해끼라"
하고 하루가 시작된다
아침은 돈타기 경쟁이다
선비의 주머니 끈은 엥간해선 열리는 법이 없었고 잠을 잘때 외에는 몸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소설아닌 #소설쓰기
제3탄
양반과 선비

아버지는 양반 중에 양반 행세를 하였다
언제나 하얀 한복 바지저고리에 중절모를쓰고
신발은 가까운 곳은 백옥같이 희게 닦아 놓은 하얀 고무신을 신었다
흰 고무신은 언제나 어머니가 닦아서 댓돌위에 신기 좋게 가지런히 올려 두었다
어쩌다가 도시로 갈때 혹은 멀리 출타하실때는 구두를 신었다
구두는 아이들을 시켜 닦게 하였고
구두 닦는 당번이 되면 무척 힘이 들었다
말표 구두약을 천 쪼가리에 고루 바르고
광이 나게 닦아야 했다
단번에 통과되기는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런 아버지는
하얀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와 중절모를 쓰고 구두를 신고 어디론가 출장을 다녀 오곤 하였다
사라의 엄니는 늘 아버지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는 현모양처였다
여름이면 삼베나 모시로 옷을 해서 입혔고 겨울이면 무명겹옷안에 솜을 넣어 따뜻하게 입혀야 하는 삶이었다
글만 읽는 선비생활에다 언제나 사랑채에는 손님이 들끓었다
그야말로 손에 물 마를 날이 없는 삶이었다

1대 독자였던 할아버지는 아들을 애지중지 길렀고 공부만 시켰다
아내는 고달픈 농사를 일꾼을 데리고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청보리가 누렇게 익어 갔고 마침내 타작을 하게 되었다
마당을 비자루로 쓸고 탈곡기며 도리깨며 다 동원 되었고 올망졸망 아이들도 타작하는데 일손을 보태었다
마당에  널어 놓은 보리는 여름 뙤약볕에 잘 마르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소낙비가 많이도 내렸다
엄니는 아이들 이름을 남김없이 불렀다
순자야
영자야
복순아
용환아
고사리손으로 보리를 담아 비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그래도
사랑채에 아버지는 공자왈 맹자왈 글을 읽고 내다 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곧 군주였다
세상의 험한 노동과 먹고 사는 일은 모두 아내의 일이었다

둘째부인은 결혼식만 치루고 신랑은 군대에 차출되어 갔다고 하였다
그 사이 6.25동란 참전 용사로 남편을 잃고 지냈는데 아버지와  연이 닿아 소실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17세에 첫아내를 맞이 하고 27세에 두번째 부인을 맞이한 양반이자 선비였다
그때 본부인은 1남3녀를 두었으니 칠거지악에 들 일도 없었다
광대뼈가 튀어 나오고 뻐드렁니에 눈이 희번떡한 그 여인이 어디가 좋았는지 그 여인을 무척이나 사랑한 모양이었다
밤마다 그의 처소를 찾아들었고 20대의 본처는 독수공방을 했다는 것이다
통시의 담벼락에서  직선거리 150여미터
신랑을 내어준 그 심경이 어땠을까
두지붕 한가족이 되어 양반선비를 나누어 가지며 사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양반선비가 폐암으로  하늘로 돌아가고 그의 공책 페이지마다"느그 작은 엄마 불쌍한 사람이다 잘 부탁한데이" 하고 써 놓았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일이었다


●#소설아닌 #소설쓰기
제 2탄

어제 저녁에 뭘 먹었는지 갑자기 큰 일이 보고 싶었다

그것도 새벽녘이다 보니 하늘에 별은 총총했고 바람은 으시시하게 불었다
가야 하는데 망설여진다
언니로부터 들은 괴담으로 인하여  더욱 무서움이 밀려 왔다
그러나
배는 더욱 꼴꼴 거리며 밖으로 내 보내지 않으면 바지에 똥을  싸 버릴 태세다
빨간 주머니 줄까
파란 주머니 줄까    그 중 하나를 선택하면 괴물이 나온다던 괴담도  더 이상 배변활동을 막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외투를 걸치고  방문을 밀고 툇마루를 지나 뚝담으로 내려 왔다
달도 밝고 별빛도 총총하건만 두려움은 여전히 몰려 왔다
두다리를 꼬며 아랫채 소마굿간 옆에 위치한 통시를  향해 가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정말 귀신이 나타난 것일까?
하얀 옷을 입은 물체가 담벼락에 붙어 있지 않은가
소리소리 지르며 엄마를 불러대었고 정신은 혼비백산 했다
그 자리에 바로 엄마가 서 있었다
엄마도 사라도 서로 크게 놀랐다
나는 엄마가 왜 밤중에 나와 화장실 담벼락에 붙어  있는지를 몰랐다
아마 그녀는 여러번 해 본 일이었다

늘 중절모에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고 백옥같은 하얀 고무신을 신고 다닌  아버지는 독자였다
할아버지는  아들사랑이 지극하여  송기선생이란 한학자를 찾아 의성에서  화산으로 이주를  하셨다

사라가 국민학교를 입학하던 해 청보리가 피어난
어느날 나보다 키가 큰 남자 아이가 울아부지를 자기 아버지라 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일이다

아버지는 한학을 오래해서 사서삼경에 능통했고
송기선생님의 수제자 노릇을 한 것 같다
초가 삼칸 집 바로 옆에는 다랑이 논이 두어개가 펼쳐져 있다
그 아래 개울을 지나면 아버지가 글을 읽으며 지내는 서당이 있었다
농한기에는 동네 아이들이 모두 그곳에 모여  천자문을 읽고 그걸 떼면 사서 삼경도 읽었다
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동네에서는 훈장님딸이라고 사라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서당 한켠에 어느날 어떤 여인과 용재가 이주를 했다
알고 보니 의성에서 그 여인과 용재는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가까운 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사라의 집 통시 담벼락과 서당은 직선 거리로 150여미터 밖에 되지 않았다
저녁 해그늘이 지고 아이들이 자면 아버지는 살금살금 그 여인이 있는 서당으로 가서 밤을 새우곤 했다

그 여인은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
광대뼈가 툭 튀어 나오고 이는 뻐드렁니에 눈은 희번떡 거렸다
생긴것 처럼 성질도 고약했다

●제 1탄. #소설아닌 #소설쓰기

청보리가 이삭을 올리고 종달새가 지지배배 하늘을 나는 어느 봄날
나보다 큰 남자아이가 중절모자를 쓰고
하얀 바지저고리에 하얀고무신을 신은 중년 남자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  아부지 손은 참 커요
나도  아부지하고 같이 살고 싶어요"

용재는 연신 아버지를 쳐다보며 재롱을 마음껏 부리고 있었다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고 가슴엔 광목 손수건을 핀으로 꽂은 채 학교를 다녀 오다 그 모습을 본 사라는 본능적으로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처음 본  남자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보고 정답게 손을 잡고 걸으며 "아부지요  아부지요"
하니 어이가 없었다

쏜살같이 달려가  용재를 밀치고
아버지 손을 순식간에 나꿔 챘다

"야 이 종내기야 울 아부지다
니가 뭔데 울아부지를 느그아부지라 하냐"

용재도 질세라 잽싸게 머리카락을 잡고 사정없이  보리밭으로 사라를 패대기쳤다

"야 ! 이 가시나야 울 아부지다"

사라의 키 높이만큼의  언덕배기의 보리밭으로 떨어진 사라는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채 집으로 뛰어 들어 갔다

엄마 엄마 소리쳐 불렀다
아주 큰 일이 벌어진 것을 알리고 엄마의 응원을
얻고 싶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느라고 불을 때고
있었다

엄마. 엄마...
"어떤 종내기가 울 아부지를 즈그 아부지래" 하고 흐느껴 울었다
분하고 또 분했다
아버지를 뺏긴 분노가 하늘로 치솟았고
떨어져 아픈 건 느낄새도 없었다

큰 가마솥에 저녁밥을 짓고 있던 엄마는 아무말 않고 있다가 눈가에 눈물을 비치며 말을 했다

"갸도 즈그 아부지 맞데이"

이해할 수 없는 동생이 하나 생기었다는 것인데 어린 사라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갑자기 나보다 큰 남동생이  생긴 걸까?
용재는 사라보다 한뼘이나 키가 컸다

엄마는 어린 사라를 설득할 명분을 찾는 듯 하지만 마뜩치 않은 눈치였다